얼마 전 내가 졸업한 대학의 학보사 출신 선후배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대부분 언론 외의 직종에 종사하는 동문들이었지만, 학보사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로 모인 만큼 화제는 그때 그 시절 ‘학보사 기자’였다.(지금은 ㅇㅇ대신문으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ㅇㅇ대학보 였다. 5.16이후 대학 신문이 무슨 신문이냐, 학보이지, 학보로
경제신문은 일반종합지나 방송과 형식적으로는 크게 차이?〕ち?않는다.종합지나 방송이 다루는 모든 분야를 다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아마 차이?〕?摸?기사의 양적인 측면에서 정?』英만湧?비중이 적은 대신 경제면의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다루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실제로 모경제신문의 경우 종합일간지로 등록이 돼 있기도 하다.그런데 이런 정도의 차이에서도 기자사회는
새해 1월은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기자들도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때다. 묵은 해에 무엇을 잘 했고, 또 무엇을 잘못 했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좀 더 나은 기자가 되고자 다짐을 한다. `메신저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지사(志士) 같은 기자가 되겠다'는 거창한 생각들은 언제부터인가 나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자 명함을 들고 다닌지도 십수년이
“시민단체에서 하라는대로 했더니, 배가 너무 고픕니다”얼마 전, 언론운동단체들이 모여 지역언론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전국행사에, 지역의 한 기자가 손을 들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 기자가 속한 신문은 도민들이 주주로 만든 신문으로 신문시장에서 꽤나 인정받는 매체였다. 지역의 다른 언론들이 금기시하는 많은 문제점들을 취재, 보도하면서 신문의 명성은 높
기자가 지사(志士)였던 시절은 언제일까? 배고프지만 굽힐 줄 모르고 당당한 기자가 되고 싶은 적이 있었다. 97년 2월 기자라는 ‘꼬리표’를 달기 시작해 이후 회사도 옮기고, 흘러흘러 서울까지 와서 지방지 기자생활을 하고 있지만 문득, 꿈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애초에 크고 높은 뜻이 없었으니 큰 실망도 없지만, 사범대를 나와 교사 보다
‘기자’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여러 선배 기자들이 다녀간 자리에, 1년이 채 안 된 햇병아리 기자의 고백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지금껏 ‘기자들의 고백’ 코너를 채워왔던 많은 선배들의 글을 보면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반성하고, 때로는 애잔한 가슴으로 종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몇 년 차”라는 말 자체를 쓸 수 없는 나의 고백은, 모험담도 없
대학 4학년 때 네 가지 이유로 기자가 되고 싶었다. 첫째 넥타이를 매고 싶지 않아서. 둘째 물이 반쯤 찬 컵을 보며 ‘물이 반이나 남았네’,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 등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직업인 것 같아서. 셋째 적당한 사회적 프리미엄이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이면 사회정의, 개혁 등 20대의 호기(呼氣)도 적지않이 작용했다.2004년이 숨 넘어가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중견 기자의 길로 접어든 듯하다. 21세기를 여는 해의 마지막 달 입사를 했으니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만하면 중년 기자라는 타이틀도 어울릴법 하지 않은가?이 코너의 제목은 '기자들의 고백'이다. 그런데 사실 미리 고백을 하자면, 난 기자가 아닌거 같다. 그래서 이 코너에 글을 쓰는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기자들의 고백이라는 글감을 앞에 놓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아마도 고백이라는 말의 무게 때문인 것 같습니다.숨김없이 말한다는 뜻의 고백이 마치 고해성사처럼 느껴집니다.죄를 빌고 용서를 구하듯이 고백을 통해 지난 삶을 다시 돌아보니 잘 못한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얼마 전입니다.전국 공무원노조가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일이 있습니다.기자로서
몇년전 금융업무를 담당할 때다. 광주은행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당시 광주은행은 금융권 통폐합 열풍이 휩쓸면서 우리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될 위기에 놓여 있어 지역민과 은행 직원들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독자 생존을 하는 것과 금융지주회사에 편입돼 결정권을 상실하는 것은 종사자 입장에선 엄밀히 말하면 독립국가 국민이냐, 식민지 국가 국민이냐 정도 만
나는 지금 지식과 지혜의 틈바구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지식도 탐나는 물건이지만 왠지 그것만으로 역부족일 것 같아 이런저런 고전류를 뒤적거려본다. 그러나 신시류(新時流)를 명쾌하게 해부할만한 지혜의 시각은 아직 멀기만 하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다. 누구나 처음엔 지식의 세계에서 우쭐댈 것이다. 지식이 증가하면 몸은 힘을 받기 시작하고 튀기 시작한다.
'명색이 기자의 고백인데, 고백이라면 숨김없이 솔직하게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끝까지 고사했어야 했는데....'아뿔사!! 이미 버스 떠난 뒤였고, 물은 엎질러져 있었습니다. “알몸 드러내긴 쉽지 않을 것이고, 속옷 정도는 보일 만큼 벗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통신사에 몸담고 있는 동료기자의 '애정 어린 충고(?)'만 줄곧
'기자들의 고백'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때가 벌써 3주전, 그리고는 지난 2년 동안 기자로서의 '나'를 한번 되새겨봤다. 어떤 고백을 해야 할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미 이곳(기자들의 고백)을 먼저 다녀간 선.후배 기자들의 '고백'에서도 나는 예외이지 않았다.
기자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9년째다. 편집장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뭔???‘고백’하겠다고 대답은 했는데... 주어진 시간은 다 지나고 적절한 소재는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고백’할 일이 없어서?... 푸하~ 그러면야 정말 뿌듯하련만, 나뿐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누구나 ‘No’라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9년이 다 돼도록 하루하루 취재하고
몇 년 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친구들과 우연히 술집에 갔었는데 옆 자리에 있었던 손님들이 어떤 한 주제를 가지고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었다. 무심코 마른 안주를 뜯어 먹으며 친구들과 담소를 하고 있는데 옆자리의 손님들의 말소리가 너무 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저절로 들렸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이 열을 올리면서 나누는 내용이 얼마 전 내
'기자들의 고백' 원고를 부탁받은지 일주일... 1분전에 들은 이야기도 깜빡깜빡하는 정신인지라 까많게 까먹고 있다 마감시간이 지난 토요일 낮이 되어서야 겨우 생각이 났다. 일주일 중 간신히 편히 쉴수 있는 토요일 오후... "간단하게 한줄 그리고(^^) 만화책이나 보며 뒹굴어야지"생각했었는데... 겨우 1년반 남짓한 기자생활중 왜 그렇
돈과 권력앞에서도 언론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터넷 언론들이 생겨나기 이전인 불과 몇 년전만해도 절대 그렇지 못했다. 재정적으로 넉넉치 못한 지방 언론사에게서 그런 자유를 찾기는 더욱 힘들었다. 왜냐하면 지역마다 대기업들이 연간 수십억원대의 광고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도 일부 언론사들이 갈등을 겪고 있는 경영권과 편집권의 분리가 요원했기 때
지금까지 [기자들의 고백]이 모두 내게도 해당되는 것들이어서 사실 나는 고백할 공백이 줄어든 상태다. 그중 특히 내게 공감을 주는 것은 “죄 없는 자는 이 여자를 돌로 쳐라”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한 [고백]이다.참으로 나는 고백한다. 나는 ‘그 여자’에게 수많은 돌을 던졌다. 아직도 던지고 있다. 내일도 던져야 한다. 괴로운 일이다. 나만 깨끗하면 괴로울
으레 기자들이 어디서나 쉽게 '환영' 받는 사람은 아니다. 항상 좋은 것 보단 나쁘고 '구린'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기자의 특성상 취재원들에게 겪을 '냉대'는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기자'들에게도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하는 '기자'가 있다. 바로 '
기자에 있어 존재(存在)의 의미란 무엇인가?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대학교 3학년 시절. 당시 이공계 계열을 전공한 나는 취업 또는 대학원 진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전공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대학원 진학은 끔찍이도 싫었고 그렇다고 뾰족한 취업의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서울의 한 출판사에 다니는 선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