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때였으니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당시 나는 방송작가가 되고자 작가교육원을 다니고 있었다.일주일에 한 번 기차를 타고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는 고된 시기이었지만 힘들거나 괴롭진 않았다. 오히려 칙칙폭폭 꿈을 향해 다가간다 생각했기에 가는 길은 즐거웠고, 오는 길은 뿌듯했다. 그런 나에게 기차 안에서의 만남은 또 하나의 설렘이었다.&lsqu
12월. 인연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섣부른 ‘옷깃 인연’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삶의 중요한 반전, 터닝포인터를 갖게 하는 인연은 언제나 가슴 떨리게 한다.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때,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그런 인연은 어쩌면 행운이다.필자에게는 ‘이제석’이라는 친구가 그런 인연이다. 이제석. 동네 간판
가을이 깊어질 때쯤이면 이 도시에서도 종종 자욱한 안개를 보게 된다.안개의 형성이야 당연히 기상의 요건 때문이겠지만,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게 짙게 깔린 안개를 만나면 자연적인 현상을 인지하기에 앞서 먼저 몽환적인 기운을 느끼게도 된다. 어떤 위험이나 추함 따위는 예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안개의 위용은 시공간의 존재를 무시해버린 신비감이나 황홀감
'수능 날까지 성적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식후에 이는 졸림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무사 진학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출제되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시험을 치러 가야겠다./ 오늘밤에도 재수(再修)가 꿈에 스치운다' 재작년에 네 또래의 수험생 셋이 엮었다는『대한민국 학교대사전』의 '서시(序詩)' 패러디라고 하더구
가을이 되면 환장할 것 같았다. 눈이 멀 듯한 단풍은 언제나 형체없는 그리움을 불러왔다. 따갑게 부서지는 가을햇살이나 청명하게 높아진 하늘이나 애처로운 풀벌레소리들은 뭔가 빈 가슴을 ‘솨아~’ 하고 훑고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가을이 오면 떠나야 했다. 내 가슴의 바람이 나를 못살게 굴었다. 헌데, 올해 가을은 나를 들뜨게 만들지 못했
애수의 계절에 시 두 편 살풍경(殺風景)이란 말이 있지요 자칫, ‘풍경을 죽이다’ 또는 ‘풍경을 감소시키다’는 뜻으로, 분위기에 걸맞지 않는 행동이나 풍류를 모르는 사람의 엉뚱한 말과 행동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애수의 계절에 썰렁한 시 두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감나무가 너
둘째 조카가 태어난 지 한 달. 힘들어하는 동생 부부의 요청으로 지난 주말 큰 조카를 하루 데리고 있었다. “10시쯤 자면 아침 8시까진 안 깨고 자.”잘 먹고, 잘 싸고, 잘 놀던 아이는 10시가 넘어도 잘 생각을 안 한다.내 손을 이끌고 밥솥으로 데려가 맘마 맘마 하는 걸 두어 번, 김에 싼 밥을 고 작은 입에 쏙 우겨넣어 주면 또
생각보다 일찍 가을이 왔다. 가을은 언제나 청아한 달빛 아래 풀벌레들의 합창으로 시작된다. 단풍으로 절정을 맞이하는 가을은 낙엽 속에 스러지며 다음 계절로 사라진다. 나는 가을의 그 모든게 좋았다. 가까운 팔공산에 자주 들락거리며 짙어가는 가을을 지켜보곤 한다. 도심 가까이 이렇게 깊은 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대구 사람치고 갓바위 돌부처님
결혼한 여자의 직장생활이란 다중의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슈퍼우먼의 요소를 갖춰야한다. 하루 종일 업무로 시달리고 때론 회식자리에서도 마시고 싶지 않은 술 한 잔 해야 하는 버거움까지, 그리고 상사와 동료들 사이에서 오가는 보이지 않는 경계.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예상보다 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생활의 너저분함이 눈에 들어온다. 개수대에 쌓인
-김종국 카메라 감독님께 김 선생님! 이렇게 가을이 옵니다. 지난여름의 대통령 서거 소식, 이제 마음 안에서 고요함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네요. 그날, 경주 보문의 한여름 꽃그늘에서 빡빡했던 일정을 잠시 접고 쉬는 틈에 문자 메시지를 통해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정리 되지 않은 그리움 위에 다시 큰 슬픔이 겹치고 말았던 그 날은, 제게도
요즘은 여자형제 많은 것이 참 ‘복’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 키우며 맞벌이로 살기 위해 친정과 나란히 붙어 지내는게 대세라지만 나이가 들수록 언니들이 좋아진다. 몹시 외롭고 우울할 땐 아무 이유없이 언니한테 가고 싶다. 나의 유년이 세 언니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았던 흐뭇한 추억들로 풍성하게 채워져 있을 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집안
어린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학교까지의 길은 대부분 좁고 긴 골목길 이였다. 길가에 쭉 늘어선 집들이 거의 내 동무들의 집들이였다. 이 길을 내 동무들과 매일 매일 뛰어 다녔지. 내가 살았던 삼덕동의 그 초라하고 퇴락한 집 옆에도 좁은 골목길이 있었지. 큰 길가의 집에서 살았던 내 동무들은 골목길에 살고 있던 애들을 ‘골목애’들이라고 불
법(法)과 물(水)내가 대학에서 법학개론을 배울 때, 교수님께서 '법(法)이란 물(水)이 간다(去)는 뜻인데, 법은 물 흐르는 것 같이 흘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는 참으로 좋은 뜻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시간이 흘러 어느 책에서 '法이란 한자는 약자(略字)이며 원래 정자(正字)는 灋인데, 이 글자에는 물(水)과 해태(&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법률상담을 하다보면 이런 하소연을 하는 상담의뢰인이 많다.상담의뢰인 자신이 돈을 받지도 쓰지도 않았는데 왜 자신이 돈을 변제해야 하느냐 억울하다, 자신이 폭행을 한 적도 없고 오히려 폭행을 당했는데 왜 손해배상을 해줘야 하느냐 억울하다, 배우자가 간통을 해서 상간녀 집에 가서 따졌을 뿐인데 배우자와
사직. 참 묘한 단어다. 때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단어이고, 때에 따라서는 참 낭만적인 단어다. 김훈은 27년 기자생활동안 20번의 사표를 썼다고 한다. 한번은 사직서에 ‘사직합니다’ 다섯 글자만 남겼다. ‘안녕히’라고 세 글자만 적은 적도 있다고 한다. 더러워서 그만두는데 너무 많이 적어주기 싫었다는 게 이유였다.
1. 제로로 사는 즐거움 2008년, 년 말에 세통의 편지가 왔다. 첫 번째는, 유가 환급금 받으시오두 번째는, 국민 건강 보험 피부양자 자격 상실이오세 번째는, 국민연금 가입하시오.친구는 말했다. “근데. 넌 아직도 건강보험료도 안내고 사니? 대한민국 국민 맞아? 이제껏 버텼다면... 대단해. @@”그러니까, 사실은, 나라가 알 정도
연말이다. 나에게 연말의 가장 큰 행사는 새해 수첩을 만드는 일이다. 속지를 사서 일일이 달력을 그려넣고 백지를 넉넉히 끼워서 옛날식으로 끈을 묶으면 수첩 한권이 완성된다. 표지를 예쁘게 그려넣어 비닐을 입히고, 스티커 붙여가며 챙겨야할 기념일들을 죽 적어 넣으면 일 년 준비 다 한 것 같다. 뿌듯한 마음으로 빈 수첩을 연신 뒤적이면서 한 해를 살아갈 내
어느새 거리의 가로수들은 뼈만 앙상히 남았다.지난 봄날의 슬프도록 눈부셨던 아름다움과 여름날, 청춘의 부푼 가슴마냥 싱그럽기만 했던 신록 그리고 불타듯 수놓았던 단풍의 절정을 이젠 추억 속에 드리우고 다시 새 생명을 위한 진통처럼 헐벗은 모습으로 겨울 앞에 섰다. 뚝뚝 떨어져 나뒹굴던 낙엽들마저 사라지고, 도시는 여느 해와 다름없이 겨울맞이를 시작했다. 과
아직도 내가 아프면 엄마도 함께 아프시다.어김없이 다음 날이면 전화를 하신다. 새가 되어 하루에도 수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몇 번 다녀가시곤 하신다며 너스레를 치신다. 손끝이 갈라지고 허리가 휘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걱정을 하시며 제 철 음식이 최고라며 텃밭을 일구며 고집을 하신다.내가 결혼을 하고서 아이를 키우며 엄마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타짜들이 설쳐대는 거대한 도박판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몇몇 고수의 타짜들이 기술이 변변찮은 하수들을 호구로 여기며 판돈을 따가고 있다. 한국이란 판에선 한국의 소수 타짜들이 그리고 세계란 판에선 몇몇 타짜 나라들이 판쓸이를 하는 것 같다. 펀드 광풍. 펀드에 몰빵했던 국민들, 반토막 난지 오래고 계속 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