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빽’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기자 초창기 시절에 글 쓰는 재미 외에도 고위 공직자, 경제계 CEO, 잘 나가는 문화계 인사들을 만나면 내 신분이 상승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아가씨가 나오는 술집에 처음 가서 내 또래의 여자들이 술 접대를 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엉엉 울기도 했지만, 나는 곧 그런 생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특히 분
흔히들 신문의 꽃은 사회부, 그 중에서도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담당기자라고 한다.나는 기자생활을 한지 이제 갓 1년을 넘긴 새내기 사건담당기자다. 취재기자들 사이에서는 ‘사건 복(?)이 많은 기자’란 말이 있다. 유난히 대형사건이나 사고가 많이 생기는 출입처만 담당하게 되는 기자에게 농담처럼 던지는 말로 대구신문에서는 내가 바로 사건 복이 많은 기자다. 나
"기자는 안돼!!". 중, 고교 시절 모든 것을 함께했던 친구가 술자리에서 일갈을 놓았다. "무슨 얘기야?". 영리한 이 친구가 뜬금없이 꺼내는 얘기는 아닐 거란 믿음속에 귀를 쫑긋 세웠다. "기자들이 힘이 없는 거냐 아님 의식이 없는 거냐?". 친구의 독설은 이어졌다. "신문에 뻔히 보이는 정치적 왜곡 기사를 기자가 의도적으로 썼다면 생각이
고백, 새길수록 죄스럽다. 기자로서의 고백은 더욱 그렇다. 몇 번을 곱씹어 발음해보지만 죄스러움은 크다. 어떻게 말할까? “미심쩍을 땐 진실을 말하라” 그래서다. 잠시 자문해보기로 한다“나는 기자로서 치열했는가?”“나는 기자로서 침묵하지 않고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나는 기자라는 ‘가식의 누더기’ 를 쓰고 있지 않은가?”답은 간결하다 “그렇지 못했다”.
1995년 2월의 끝자락.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앞으로 있을 전쟁의 현장을 향해 대구 북구에 있는 한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YTN. 신생 방송국이라 잘 모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누비며 기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봄날의 기운을 느끼는 4월의 전쟁이 나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1995년 4월 28일 아침. 이 날은 내 인생의 한 획을 긋는 날이었다.
기자를 흔히들 민간 사가(史家)라고 한다. 관료(官僚)가 아닌 민간인으로서 우리사회에 일어나는 갖가지 일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기록해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이제 기자직에 종사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늘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수많은 기사를 쓰고 방송해왔지만 허공에
‘문핏대’로 통하던 문희갑씨가 대구시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1998년 10월의 마지막날에 대구시청 화장실에서 ‘깡통천사’로 불리던 송모(당시 57)씨가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시청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하겠죠.그런데 그 자살의 사유가 더 문제였습니다. 6.4지방선거 때 문 시장 선거운동을 해주는 대가로 자신의 저서 ‘깡통으로 맺은 사랑을’
얼마전 모처럼 경북 안동으로 현장취재를 갔다 온 적이 있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주요 취재원을 만났더니 댓바람에 하는 말이 왜 취재를 하려고 하는데요? 기사내용은 어떻게 쓸 건가요? 취재를 하러갔다가 오히려 취재를 당하는 입장으로 뒤바뀐 상황이었다.얘기를 들어봤더니, 그동안 지역언론사에 여러 차례 취재요청을 해봤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한번 나와보지도 않더라는
기자란 일을 시작하는 나에게 내 인생의 지도 같은 선배가 해준 이야기로 힘든 고백을 시작할까 한다. 왕의 말이 곧 법이던 절대 군주 시대. 다리가 한쪽 밖에 없는 군주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불렀다. 불려온 화가는 외다리인 군주의 모습을 실제와 똑같이 그렸고, 완성된 그림을 본 군주는 외다리인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그려 자신을 기만했다는 이유
"탄핵 가결되는거 봤나?, 이제 시민들 반응도 알아보고 슬슬 기사 준비해야지" 지난 3월12일 아침부터 출근도 않고 TV앞에 머물러 있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참담한 광경 앞에서 한동안 '멍~'했다. 때마침 기사를 준비하라는 선배의 전화가 걸려왔고 그제서야 또 다시 나는 기자였다. 무언가 왕창 무너져버렸다는 서글픔에, 설마했던
“결혼해서 먹고 살려면 분명히 바뀌게 될 것이다, 그게 이곳의 법칙이다”. 처음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선배들에게 들은 얘기다. 커다란 신념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사회부조리를 파헤치고 사회정의와 약자들의 대변인이 될 것이라는 거창한 혼자만의 다짐을 가지고 출발하려던 나에게는 적잖이 실망을 던져준 말이었다.경찰서와 노동현장을 뛰어다닌 기자로 1년. 비록 긴
지난 주 일요일 저녁 우연히 보게 된 엠비씨 2580. 기자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을 하나하나 꼬집어 내고 있었는데, 혀를 끌끌 차는 아버지와 달리 내 속은 내내 불편했다. 동네 삼류 기자를 자칭하는 나는, 아무튼 이 직업을 갖고 나서 저들보다는 조금 스케일이 작은, 그러나 이제 그것이 인지 아닌지도 감이 잘 안 올 정도로 서서히 잊어버리고 있는 그런 특권을
대학까지 졸업하고 한 분야에 10년이상 한우물을 파면 흔히들 전문가축에 든다고 한다. 최소한 나의 경우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무력감마저 든다. 기자생활의 연차가 올라갈수록 어렵고 두렵고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이다.언론계에 발을 들여 놓은지 3~4년차의 일이다. 그땐 나도 "능력있는 기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무엇이 유
신문사에 들어 온 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별 망설임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기자만큼 좋은 직업이 없는 것 같아서요"그렇게 자부심 넘치는 '기자'가 된 지 꼭 1년6개월 뒤부터는 그런 대답을 하지않는다. 내 기준에서 '좋은 직업인 기자'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부정한 여인을 끌고 와 율법대로 처벌할 것인지를 묻는 군중의 물음에 답한 예수의 말이다. 예수의 이 말에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예수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난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이 아니다. 또 이 부분에 대한 종교적 해석이 앞으로 내가 말하려하는 논지와 연관성이 떨어
'개혁'이 시대의 화두다.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21세기 대한민국 존립을 위한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점진적이냐 급진적이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거스를 수 없는 물결로 다가오는 개혁의 위중함을 언론이라고 외면할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제대로 된 '개혁'을 이끄는 중심축으로 기능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
몇몇 사람의 평가지만 나는 유능한 기자다. 지난 2월 교직원 인사 때 심부름을 잘한 대가로 받은 평가다. 인사 발표를 2,3일 앞둔 날부터 선후배들과 지인들의 부탁이 쇄도했다. 친구 혹은 친인척 중에 교사가 있는데 새 발령지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2,3일만 기다리면 발령지를 알게되지만 교사들은 하루라도 일찍 발령지를 알고 싶어한다. 인사 발표 후 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