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식구들을 태우고 어디론가 떠납니다. 붐비는 공원이나 절집을 한 바퀴 돈 뒤 당신은 한없이 밀리는 차들 사이에 끼여 일요일 오후를 소비합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 불친절을 감내하며 음식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일요일이 배 속에서 소화되며 혹은 연기에 그을리며 소비됩니다. 다시 어두운 월요일을 기다리는 일요일 밤이 다가옵니다.
유난스럽게 무덥던 올 여름, 가장 유용했던 물건은 에어컨과 선풍기였던 듯싶다. 한 여름이야 에어컨이 있으니 선풍기가 오히려 거치적거렸지만, 여전히 더웠던 9월과 10월은 에어컨을 틀 수 없으니 선풍기가 짜증을 덜어내 준 고마운 물건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5층에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는 남향이어서 에어컨이 켜주지 않는 날은 그야말로 찜통이다)이
며칠전에는 어머니와 함께 통밀로 손국수를 밀어 먹었다. 어머니는 국수를 밀면서 그 옛날 집에서 농사지은 밀을 빻아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국수를 만들어먹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궁핍했지만, 음식에 대한 불신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 그게 왜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는지...
은, '강을 원래대로 돌려달라'는 뜻의 '청소년 도보순례단'입니다. 지난 4월 14일 한강 하류를 출발해 여주, 문경, 대구, 구미 등을 거쳐 5월 31일 부산 을숙도까지 47박48일을 걸으며 각 지역의 생태.환경을 체험하고 정부의 대운하 방침에 대해 토론하며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 어류생태 조사, 강연을 비롯한 활동을
일주일 중 온전히 밥벌이에 관련된 어떠한 일도 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날이 하루는 있다. 그날은, 밀린 빨래를 하거나, 밥을 해 먹는 수고를 수고로 느끼지 않는 즐거움을 가져 보거나, 스물 네 시간을 범죄 드라마에 투자하거나, 그것들마저 귀찮으면 시체놀이를 한다. 주 단위를 넓혀 절기로 보자면, 일 년에 두 번 하는 옷방 대 정리도 바로 저런 시간에 해치
기억한다. 스무권이 넘는 책들은, 반은 주홍색, 반은 노랑색으로 된, 반들거리고 딱딱한 하드커버의 동화책이었다. 지금까지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나 도시의 이름들, 그런 우주적인 장소에서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한권 전체를 차지하기도 했고, 때론 시나 잠언만큼이나 짧기도 했지만, 물리적인 길이와 의미의
중2짜리 조카 녀석이 가출을 했다. 벌써 두 번째다. 처음 가출했을 땐 형부를 탓했다. 공부하기 싫은 녀석을 억지로 학원일정 짜가며 숨도 못쉬게 조아댔다고 형부를 닦달했다. “원인을 알고 재발을 막기 위해선 청소년 상담이나 가족상담을 받는 게 좋겠다”면서. 헌데 정말 이번 가출은 나도 어리둥절했다. 하루에도 백번 넘게 기분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녀석 때문에
"요즘 나 '번쩍거리는 화살표'가 보여". 예순 셋 노모의 퀭한 눈가에 눈물이 얼핏 비친다.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노모의 묵직한 고요가, 사납고 불길하다.'번쩍거리는 화살표'라니? 무슨 소리를 하시나?"몇일전에 자고 일어났는데 눈앞에 번쩍번쩍하는 불빛 왔다갔다 하는 거야. 눈을 아무리 비벼봐도 좀체 사라지지도
그것을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그 때가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서울에서 전학 온 희석이는 여러모로 대구 촌놈 코찔찔이들과 달랐다. 드물게 장발인데다 옷은 늘 줄무늬 셔츠에 조끼를 받쳐입고 서울말을 쓰는, 세련된 귀공자 타입이랄까. 희석이를 처음 만난 건 내 친구 미정이 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희석이는 미정이 바로 옆집에 이사를 왔고 부모님들이 같은 직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일일지 몰라도,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 무렵 부모님들은 다들 그랬듯이, 우리 부모님은 먹고 살기 바빴고,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식 교육이 절실하긴 했으나 현실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유치원은 좀 사는 집 아이들이나 다니는 것인 줄 알았던 시절, 한글은 취학 전
지난 연말 친구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상심해하고 있는 친구를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 둘이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 친구를 위로하면서 우리 부모님도 언제 가실지 모르니 있을 때 잘해드려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결심했다. 그 다음날 오후,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나서 전화 드려야지 하다가 바쁜 일상에 생각만 가득한 채 결국 전화를 하지 못하였
아이의 초등학교 예비소집에 다녀왔다.괜히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주인공인 아이는 태연하다 못해 심드렁한 표정인데엄마 혼자 얼굴이 발개져서는 연신 쉼 호흡을 했다.초보 학부모 티를 너무 냈나 싶기도 하다.예전 내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과 비교한다는 게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만어쨌든 책상 수가 30개 남짓, 그때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될 것 같았다.그런
새해다. 만나는 사람마다 덕담을 건넨다. 그런데 그 덕담들이 내게는 전혀 ‘덕담’이 아닌 때가 더 많다. 나를 황당하게 만드는 '덕담' 가운데 1위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새해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세요.'이다. 비혼주의자인 내게 '결혼'을 권하다니……. 일부일처제를 선택해서 결혼한 사람들에게
누구에게 자전거를 배웠는지는 기억이 삼삼하다. 그러나 자전거를 처음 타게 되었던 그 날의 느낌만큼은 생생하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고 그 힘으로 평형을 유지하면서 페달을 밟아 바퀴를 굴린다. 몇 번 기우뚱거리고 넘어지면서 마침내 비실비실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야~ 간다! 간다!" 저만치 가다가 신이 나서 뒤돌아본다. 멀리서 자전거를 잡고 있던 이가
이실직고 하자면, 이 글은 주말에세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반성문에 가깝다.반성문. 이 세 글자를 길게 늘여 쓴 것. 그게 지금부터 내가 쓸 글이다.하여,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쯤에서 이 기사창은 닫아도 상관이 없겠다. 올 한해를 살면서, 누군가에게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미안함’이 한구석이라도 없는 사람들은, 차라리 닫아주시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
2007년을 시작하는 재야의 종소리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2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대학들도 2학기 수업을 마치고 긴 방학에 들어가게 된다. 이번 학기 동안 시나리오 창작 수업을 맡았었는데, 최종과제물로 단편영화 시놉시스를 내주었다. 20대 초반답게 재치있고 톡톡 튀는 소재와 이야기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주
책상 위 달력이 달랑 12월 한 장만을 남기기가 무섭게, 초등학교 여자동창들 모임 송년회에 끌려 나갔다. 달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졌는데, 그 핑계들도 열한 가지는 떠오르더니만 열두 번째 핑계는 끝끝내 떠오르지 않아 눈 딱 감고 3시간만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시내 밥집으로 나갔다. 내가 기껏해야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일 뿐인 일에 왜 이리 심각한 표현을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향하던 키 작은 아이들이 운동장 한 가운데에 우뚝 서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제 등짝보다 큰 가방을 둘러멘 아이들, 말라붙은 콧물로 꼬장꼬장한 얼굴의 소년들, 새침한 입매로 벌써부터 도도함을 익힌 소
가을이 접어드는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태껏 잘 지내왔는데 올해 가을은 가슴 한곳이 뻥 뚫린 것 같은 외로움이 밀려와 너무 힘들다는 거였다. 할 일은 태산인데 일이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고 외로움에 쌓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여 거기서 오는 성취감으로 잘 살와왔는데 이젠 일도 공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
어릴 때 우리 집은 대구에서 제일 크다는 서문시장 언저리에 살았다. 나는 시장이 참 좋았다. 밥집 커다란 솥에서 김이 물물 피어오르고, 오전 품을 판 일꾼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돼지 껍데기에 막걸리라도 들이키는 날이면 지나가던 거지도 한 그릇 푸짐하게 상을 받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누추한 거지를 불러들여 시래기국에 막걸리까지 곁들여 푸지게 먹이는 시장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