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막 시작되는 어느 날, 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모처럼 느긋하게 책 읽을 수 있는 하루를 통째로 얻은 날이라 기분 좋게 사 둔 책을 들고 서재 소파에 앉았다. 한데, 기분이 묘하게 어지러워서 책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그 어지러움의 정체가 무언지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한 채 열댓 장을 넘겼는데, 꾸역꾸역 읽어내려 가는 글들이 손에 든 모래알처럼
나는 아버지에 물려받은 것이 많다. 굵고 동그란 눈을 물려받았고, 제법 보기가 괜찮은 코를 그대로 빼닮았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한번씩 불끈 하는 성마른 성정도 물려받았고, 이것저것 만들기를 잘하는 손재주도 물려받은 것 같다. 육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에, 좋고 싫음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소중한 것들이지만, 그래도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건 손재주다.아버지
아버지의 진짜 첫 사랑은 나도 모른다. 어머니가 첫 사랑이라는 아버지 말씀을 믿을 뿐이다. 아니면 또 어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 고로중학교 교사였다. 1회 졸업생들이 아직도 명절마다 찾아온다. 말만 '사제지간'이지 10살도 차이 안나는 '호형호제' 같은 사이로 보였다. 아버지는 어쩌면 '연애 도둑
"바람이 불면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이 떨쳐질까바람이 불면 내가 알고 있는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10년도 더 지난, 구닥다리 낡은 CD를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문득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이게 얼마만인지... 지
전라도 지리산휴게소에서 10분쯤 갔을까. 잘나가던 승용차가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보험회사 출동서비스로 배터리를 충전했지만 시동은 금새 꺼져버렸다. 다시 20분을 기다려 견인차량이 왔고, 우리는 남원시 어느 카센터로 견인됐다. 카센터에서 1시간 넘게 시간을 끌었다. 겨우 고쳤나 싶더니, 카센터를 나선 지 불과 50미터도 못가 또 멈춰섰다. 끙끙거리며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있었다. “넌 꿈이 뭐니?” 언제부터였을까? 더 이상 그 질문을 듣지 않게 된 게. 사람마다 그 시기가 조금씩 다를 지라도 아마 그 순간부터 우리는 어른이 되었던 게 아닐까? 취직 했냐? 월급은 얼마야? 사귀는 사람은 있니? 언제 결혼 할 거야? 사는 집은 몇 평인데? 차는 뭐 굴리고 다니지? 애들은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일 중의 하나가 전화업무이다. 아침에 휴대폰을 집에 두고 오는 날에는 집에 휴대폰을 가지러 가거나 퀵서비스에 부탁하여 휴대폰을 사무실로 받는다. ‘오늘은 휴대폰을 두고 왔으니 휴대폰 없이 하루를 보내야지’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바쁜 사람들의 가장 빠른 소통수단이 휴대폰이니 휴대폰이 없이는 너무 불편하다. 어느 날 휴대폰을 잃어버
지금 내가 일하는 사무실엔 에어컨이 두 대나 있다.40-50평 규모의 공간이 트여있다 보니, 시원찮은 에어컨 한 대로는 더위를 식힐 수 없어 늘 2대 다 틀어놓고 지낸다. 4층짜리 건물에 4층인데다, 창문이 통유리인지라 창문을 제대로 열수도 없으니 한낮에 열받은 사무실은 꽤나 후끈후끈하다.에어컨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처음인지라, 감사해야 하는 일인지도
아이 키우는 후배 집에 놀러 갔다가 새로운 블록 장난감을 보았다.내가 본 블록 장난감 중에서 가장 색다르고 독창성 있고 활용성이 좋았다. 값을 알아보니 22만원이다. 아이들에게 이제껏 장난감을 딱 두 번 사 주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지겨울 때가 된 것 같아 '저걸 사 줘, 말어...' 참 어지간히도 망설이다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할 때, 혹은 하고 싶을 때 당신은 주로 어떤 것을 선물하는가? 꽃? 옷? 보석? 상품권? 아니면, 현금? 그런데,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 꽤 있다. 값이 매겨주는 물질적 가치가 곧바로 정성의 가치로 연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만은 받는 사람에겐 지적 우월감을, 주는 사람에겐 고상한 품격을 덤으로
미국드라마가 인기다. 인터넷에서는 ‘미드’라는 이름으로 미국드라마 열풍을 알리고 있고, 케이블TV에서는 경쟁적으로 미국 드라마들을 방송하고 있다. 그러자 공중파까지 들썩이며, 미드 열풍에 합류했다. 다운로드를 받아 볼 수 있는 클럽과 사이트들도 인기다. 아예 미국 방송 시간대에 맞춰 드라마를 공수해서 직접 번역까지 하는 동호회까지 생겨났다. 그들 덕분에 많
나는 울보입니다.책을 보다가도 울고, 드라마, 영화를 보다가도 울고눈빛 슬픈 아이의 사진 한 장에도 눈물을 주르륵 흘립니다.며칠 전에는 친구에게, 돌아가신 지 한참인시외할머니 얘기를 하며 회사에서 눈물을 쏟기까지 했습니다.누구는 눈물 많은 이런 나를 보고남의 슬픔을 빌어 스스로가 우는 거라고 하던데글쎄..남의 슬픔에 기대어 내 슬픔을 해소하는 건지 어쩐 건
얼마 전 중고자동차를 하나 샀다.새 자동차도 아니고 중고자동차라니... 뭐 특별할 거 없는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좀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대학 때부터 환경운동을 시작하고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동안 어쩌다 사람들이 그 흔한 운전면허증 하나 없냐는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말하곤 했다. 도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몸이 찌뿌등 했다. ‘감기가 올려나?’ 다이어리를 펼쳐보니 오늘 해야 할 일이 모두 세 가지이다. 연습실에 가서 기타 연습 하고, 들어오면서 서점 들러 책 사고, 저녁에 평화뉴스 주말에세이 원고 쓰는 것. 일단 안심이다. 과하지 않은 일정이어서. 근데 기타 연습 하는 내내 몸이 계속 가라앉아서 들어오는 길에 서점 들르는 건 포기하고 일
5월 17일.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아무 생각 없이,인터넷을 클릭, 클릭하다가 그 한 줄의 뉴스를 보는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경북 의성. 차로 1시간 거리면 갈 수 있는 곳에서 평생을 사셨는데,나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를 읽으며 자랐던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됐고,이제 내 딸아이가 을 읽으며 자란다.그 긴 시간동안, 아무런 교류는 없었지
CT 촬영은 늘 불만이다. 내 머리 속이 정말 저렇게 검정과 흰색의 명암들로밖에는 차 있지 않는 걸까, 겨우 무채색 덩어리들의 조합이라니. 이건 거의 모욕적이다. 게다가, 특히 이번 경우에는. 내 머리 속에 혹이 있다. 물로 가득 찬 혹. “요기, 요기 보이지요? 음, 소뇌 근처에. 뭐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고. 두통의 원인이 전적으로 그것에 있는 것은
이런 속담이 있지, 왜.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지 모른다.’ 뒤늦게 배낭여행에 맛을 들여서는 짬만 나면 훌쩍 떠나버리는 내가 꼭 그 짝이다. 진정한 여행 고수들과 비교할 때, 내가 밟았던 여행지는 정말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느낀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많았다고 자부해본다. 그중 하나를 떠올린다면, “세상에.. 우리나라는 섬이었어.”라는 것이다.
천생리대를 들고 남자 교사들에게 물었다. “이게 뭔지 맞춰보세요.”알록달록한 천에 똑딱단추까지 달린 천생리대를 요리조리 들고 살펴보던 남자 교사들이 갸우뚱거리며 갖가지 엉뚱한 대답을 했는데, 그 중 압권이 ‘손잡이’, ‘마스크’ 였다. 엉뚱한 상상력에 배를 쥐고 웃었지만 어찌 이리 모를까 싶기도 하고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여성의 월경 자체가 불결하고
백발이 성성한 한 할아버지가소주 한 병을 들고 편의점을 나오더니뭐라도 묻었는지 손으로 쓱쓱 닦아서는군복 비슷한 바지의 큰 주머니에 소주를 넣고자전거에 오르는 지금 시각,뚜뚜뚜뚜~~~오전 6시다신호대기 중인 버스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그때부터 혼자 별별 생각을 다 한다.‘얼굴빛이 맑은 것으로 봐서술에 절어 사시는 분은 아닌 것 같고’‘염색은 왜 안
절친한 친구가 필리핀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일 년이 될 지, 몇 년이 될 지 기약 없이 떠난다기에 오지 말라는 걸 굳이 배웅을 하러 나갔다. 젊은 날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친구를 기꺼이 축하했지만 아무리 좋은 곳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간다고 해도 그를 오래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 동안 그 친구 덕에 내 삶이 얼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