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잘 다니던 한 후배가 지난 5월 인도로 갔다. 왜 가느냐고 묻는 게 이상했다. “그냥 인도를 꼭 가보고 싶어서요”“여자가 혼자서 괜찮겠냐?” 부모님에게 수없이 들었을 그 말에도 그는 떠났다.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 그것도 신문사에서 1년이나 일했는데 훌쩍 버리고 가다니...20대 중반의 나이에 어디 떠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해는 하지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망가진 것들에게서 나오네.몸 속에 구멍 뚫린 피리나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비비 꼬인 호른이나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너무 견고하단 말인가. -음악, 이경임 詩 책꽂이를 다 뒤지고, 책상 서랍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겨우 이 시를
몇 달전 남해안 일대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남해안 연안답사 길을 따라 가기 위해서였다.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하고 있을 무렵,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몰살 당한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남해안 연안을 직접 답사했던 바로 그 길을 따라 가던 길이었다. 경상남도 초계에서부터 수곡-진주-하동-쌍계-곡성
얼마 전, 볼 일 때문에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 일을 다 보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서는데 후다닥 뛰어나가던 아이 하나가 과자 봉지를 내 앞으로 휘익 버린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못 참고 한마디 했다. “얘, 봉지를 아무렇게나 버리면 되니?” “어차피 청소하는 아저씨가 치워요.” 이상한 소리 하는 아줌마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아이가
내가 신혼살림을 시작한 곳은 산꼭대기였다. 목까지 차오른 숨을 침으로 삼켜가며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야했는데, 꼭대기에 올라서면 시원한 소나무 숲 너머로 시야가 확 트이면서 대구시내가 다 보였다. 화려한 야경을 보면서 산책하는 일은 산동네 사람들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미로 같은 골목길 안에 우리 집이 있었다. 우리 집은 참 작
재미있게 살자. 한동안의 모토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봤자 강 한번 보러가자 산에 한번 가자가 바램의 전부였거늘, 가만 생각해 보면 ‘그 정도 여유도 없나....’ 헛! 혀를 끌끌 찰 일이다. 게다가 지난 한 달간 틈틈이 재미있자고 읽었던 책조차 마지막으로 갈수록 사회니 자본이니 하는 복병이 나타나 그렇잖아도 시끄러운 대구와 얼추 맞아떨어지는 쿵짝이 되고
2주전에 평화뉴스에서 ‘주말 에세이’ 원고청탁을 받고 난 후부터 나의 일상들은 모두 주말 에세이의 소재가 되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사회가 변해가고 있는 것들에 민감해하면서 2주를 보냈다. 하루를 마치면 컴퓨터에 앉아 일기를 쓰듯이 글을 적었는데 마무리 된 글이 하나도 없다. 나는 내가 느끼고 생각하
1.수요일 밤 자정.방송이 끝나고 나면 전화벨이 울린다.사연은 가지각색이다.“제가 도대체 뭘 하면 되죠?” 울컥 마음이 앞서 전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가만 보니 한약을 먹던데, 제 친척 중에 한의사가 있어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는 사람,“한번에 몫돈은 힘들고 다달이 얼마씩 넣어주고 싶은데, 계좌번호 좀...”큰돈은 못 부친다고 연신 미안해하며 계
1월초에 시내 한 클럽에서 자그마한 이야기 콘서트가 열렸다. 10년전 고인이 된 김광석을 추모하는 콘서트, 누가 오래전부터 마음 먹고 기획한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작은 행사로 이어진 것이다. 팀이 명목상 기획을 하고, 장소를 빌렸다. 마음 좋은 클럽 주인이 기꺼이 행사를 위해 장소를 빌려줬고, 그렇게 해서 김광석의 노래를 잊지
어릴 때부터 뭘 모으는 게 취미였던 나는 아직도 손수건을 모아 놓고 요것조것 번갈아 쓰기를 좋아한다. 나는 손발에 땀이 많은 체질이라서 한겨울에도 손수건은 필수다. 손수건이 가장 유용할 때는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 쓴 안경알을 닦을 때다. 손수건은 같은 무늬가 잘 없다. 특별한 행사나 기념일로 무늬를 삼은 손수건도 있고 구호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손수건도 있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예수 - 무엇보다도 그는 ‘홈 리스’이다. 그는 집이 아닌 곳에서 집없이 태어난 존재다. 이상하지 않은가, 집 없는 홈 리스로 태어난 자에게서 사람들이 되레 ‘집을 발견하고 집을 얻는다'오늘 아침 신문에서 읽은 이 글귀가 마음에 큰 울림으로 남는 것은 아마도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일 거다. 얼마 전 감나무골
2005년 5월, 내 인생이 바뀌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내게 뭔가 대단한 극적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이 들려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장이 과장된 것은 전혀 아니다. 올 5월부터 나는 자가용 의존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출퇴근은 되도록이면 자전거로 한다. 교통수단을 바꾸었다기보다는 다양화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텐데(버스, 지하철, 택시,
오래 전에 유행했던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혹시 기억하는지...그 이야기를 생각하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인간을 어떻게 나눌지 떠올라서 혼자서 킥킥 웃곤 한다. 돈 버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 우리 형부는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빌린 돈을 제 때 갚는 인간과 제 때 갚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을 무
결혼해 만나는 가장 낯설고 어려운 사람은 아마도 시어머니일 것이다.더구나 우리 어머니는 마흔에 남편을 잃고 혼자 억척같이 농사지어 자식들 키워낸 무서운(?) 경력을 갖고 있다. 대범하고 깐깐하고 일손 재고 경우가 발라서 누구라도 잘못한다 싶으면 바른 소리를 잘 하셔서 동네에서는 “별난 할마시”로 통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친척들이 득시글거리
서른일곱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남편과 8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다.결혼 전부터 공동체 생활을 해왔기에 결혼 이후 우리의 일상은 별다른 변화 없이 지속되는 듯이 보였다. 남편이 문간방에서 안방으로 짐을 옮겨오게 된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변화일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결혼 전 10년간 나는 남편의 선배였고, 선배라는 명분으로 당
나는 꽃이나 인형 선물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처녀 적에도 그랬다. 차라리 밥 사먹는 게 더 낫지, 꽃이나 인형은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잘 아는 후배들은 생일상을 선물한 적도 있다. 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으로 상을 예쁘게 차려서 짠! 하고 펼쳐놓았다. 상 밑에서 애인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이벤트까지 곁들여서.그런데 나를 감동시
기억의 창을 열고 펼쳐보는 잃어버린 고향. 때문에 더없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추억의 그림...할머니의 엄마, 그러니까 촌수로 따지자면 외증조모님이 사는 곳이 바로 의성 안계였다. 우리는 '외증조모님'을 사투리식으로 줄여 '진이할매'라 불렀다. 진이할매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혼자 그곳에 사셨고 코딱지만한 담배가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