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과 국가보안법"

평화뉴스
  • 입력 2004.09.1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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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락 칼럼 7 >
"분단시대 문학동인, 그리고 자숙하지 않는 자칭 원로들..."


최근 한 문학 잡지사의 청탁으로 시를 한 편 썼다.


도종환 시인이 요양하고 있는
속리산 기슭 보은 법주리 조종골
하루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들까
생각이 드는 외로운 산골짝이다
<분단시대> 문학동인이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음주하고 웃고 떠들고 기념사진 찍고
새벽녘에야 기어코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눈이 떠져 천장을 보자
창문 밖 저 멀리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전교조하고 해직되고 징역살고
마침내 병까지 얻은 그 고마운 마음 곁에
비슷하게 풍상을 겪은 또 다른 얼굴이
십여 개 누워있다 푸석하게 부은
세월의 흔적이 누워있다
조금 가혹한 것 같지만 죽을 때까지
변함 없이 그렇게 살아라, 인생
기왕 풍찬노숙인 걸 그게 역사인 걸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잠에 빠졌다
(〈별〉전문 《현대시학 10월호》)


인용한 시는 <분단시대> 문학동인 몇이서 보은 속리산 기슭에서 요양 중인 도종환 시인을 문병 간 내용이다. 알려진 바처럼 도종환 시인은 충북 출신으로 《접시꽃 당신》이란 시집이 100만 권 이상이 팔리면서 80년대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잡은 시인이다.

80년대 초 대구지역에서 배창환 김윤현 김종인 정대호 정만진 김용락 등 리얼리즘적인 문학관을 가진 몇몇과 충북 쪽의 도종환 시인과 김창규 목사 김희식 시인 등이 모여서 만든 문학동인이 바로 <분단시대> 이다. 이들은 80년대 한국 문단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도종환 시인은 충북대 사대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그는 소위 민중시를 쓰고 민족문학의 대의에 따랐다는 이유로 교육청과 정보기관의 요주의 인물이 돼 불려 다닌다. 그 와중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전교조 활동으로 학교에서 해직되고, 구속되어 징역 살고, 복직되자 병을 얻어 학교에서 사직하고 드디어 첩첩산골에 들어와 요양하는 중이다. 그의 병명은 '자율신경소이증'이라는 희귀한 병이라고 한다.

그날 시의 내용처럼 우리들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술도 마시고 떠들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풀었다. 지난 1983년, 20대 새파란 청춘들이 어느새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의 중늙은이로 변해 있었다. 사진을 찍던 중 누군가 장난삼아 "잘 찍어, 도 선생 회갑 문집에 넣을 거니까"라고 하자 도 선생이 즉시 화답했다. "9년 밖에 안 남았어" 그 소리를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평소 잊고 지냈던 내 나이가 비로소 그 짧은 순간 실감됐기 때문이다.

한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80년대 말인지 90년대 초쯤인지 도 선생이 전교조로 해직되어 청주 미평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이다. 대구에서 면회를 갔다. 빵잽이들에게는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미평교도소라는 말이 있다. 아마 타 교도소에 비해 시설이 더 좋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교도소 시설이 좋아봤자 교도소일 뿐이지...

쇠창살을 마주하고 앉았지만 사실 별 할 말이 없었다. 시대가 그러하고, 피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제가 그런 것일진대 구태여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은 그런 시절이었다. 단지 면회 가기 전에 도 선생의 네댓 살 되는 어린 딸애가(이 애가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숨졌다) 놀다가 어디에선가 떨어져 어깨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는데, 아버지가 해직되어 의료보험증이 없어져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이의 부상을 염려하자 도 선생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천장 위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는 속으로 아뿔싸 괜히 꺼냈구나 싶어 후회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말 없이 그 선한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황급히 면회장의 쇠문을 밀치고 나왔다.

아내를 잃고 어린 딸애마저 부상을 당했는데 정작 아비인 자신은 감옥에 갇혀있는 처지가 됐으니 그 때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이후에도 나는 한 번도 그 때의 마음을 물어 보지 못했다.

도종환 시인이 올바른 문학을 하겠다고, 참교육을 하겠다고 개인적인 고통과 희생을 무릎쓰고 싸울 때 군사독재정권에 붙어서 총리도 하고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며 호의호식하던 사람 천 수백 명이 자칭 사회의 원로라고 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고 나섰다. 좀 속된 말로 하자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앞서 도 선생 이야기를 했지만 그 엄혹하던 시절 고통받고 희생당한 이가 어디 도 선생 혼자 뿐이겠는가? 내 시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또 다른 얼굴 또한 그들이며, 주변에는 역사의 희생자가 무수히 많다. 이런 현실에서 민중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역사의 대의를 짓밟던 이들이 지금 와서도 자숙하지 않고 원로 자처하면서 준동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직 우리 사회의 과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구구한 논리나 이유를 굳이 대지 않더라도 이런 까닭에서라도 과거 청산은 명확하게 완결 지워야하고,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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