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지를 지닌 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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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딥스』(버지니아 M. 액슬린 저 | 한국영재교육개발원 역 | 시간과공간사 | 2000)


딥스를 처음 만난 건 아동양육시설에서 보육사로 생활할 때였다. 저녁에 아이들을 도서관에 몰아넣고, 읽을거리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공부할 의지가 별로 없는 아이들 틈바구니에 앉아 두 어 시간 읽을거리로 내 손에 잡힌 것이다. 도서관을 한 바퀴 돌며 아이들을 살피고 돌아와서 읽기를 몇 번 하다 어느 순간 나는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다 빠져나가도록 딥스에 빠져들었다. 오히려 딥스가 나를 잡아버린 것이다.

“딥스는 좀 이상한 아이입니다. 정신박약아인지,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은 아이인지, 뇌가 손상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아이입니다. 누군가 그 아이와 친해져 무엇이 그토록 딥스를 평범하지 않은 아이로 만들었는지 알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 딥스를 진찰했던 소아과의사가 했던 말이다.
다섯 살 딥스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사실이 나를 사로잡아버렸다. 내게도 딥스같은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딥스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는 아침에 자기 의자에 앉으면 하루 종일 꼼짝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주일이 지나자 딥스는 의자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교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물건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접근한다거나 쳐다보면 바닥에 있는 공을 움켜잡고 엎드려서는 꼼짝하지 않았다. 또 딥스는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으며 묻는 말에도 대답한 적이 없었다.
 
『딥스(자아를 되찾은 아이)』(버지니아 M. 액슬린 저 | 한국영재교육개발원 역 | 시간과공간사 | 2000)
『딥스(자아를 되찾은 아이)』(버지니아 M. 액슬린 저 | 한국영재교육개발원 역 | 시간과공간사 | 2000)
그러나 딥스는 유치원에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반응이 거의 없고 매우 수동적이긴 했지만 유치원 안에 머물렀고, 선생님들은 최대한 딥스를 이해하려 애쓰며 수용했으며, 언젠가는 공포와 분노로 가득찬 감옥 같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뛰쳐나오리라 믿었다. 그러나 2년간의 유치원 생활에서 거의 변화가 없자 상담자를 불러 딥스를 최종평가하기로 한다.

딥스와 A선생님은 그렇게 만났다. 매주 목요일 한 시간씩 딥스와 A선생님은 그들만의 놀이방에서 함께 놀았다. 딥스가 놀이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A선생님은 딥스가 하는 말을 다시 한 번 명료하게 정리해서 들려주며 공감해주곤 했다.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해 보이기도 하는 방식으로 A선생님은 딥스를 세상으로 이끌어냈다.

딥스는 A선생님의 놀이방에서 새로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하나씩 새로 익히며 새롭게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법을 배워갔고, 마침내 크고 안정된 용감한 딥스가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나는 딥스에게 매료되었다. 어떻게 대 여섯 살 된 어린 아이가 자신을 그렇게 완벽하게 무장하고 세상을 거부할 수 있는지, 그 어린 아이가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유지해낼 수 있었는지,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나는 상담자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따스하면서도 객관성을 잃지 않는 자기절제, 성급하게 방향을 제시하거나 유도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을 보면서 내가 왜 나의 딥스와의 관계에서 실패했는지, 우리가 안정된 자신의 자리를 찾기까지 길고 긴 시간을 돌아와야 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딥스는 놀이방에서의 한 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이면 남은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이제 10분 남았어요. 이제 3분 있으면 집에 가야 해요. 이런 식으로...
처음에 딥스는 집에 갈 시간이 되었을 때 온갖 핑계를 대며 시간을 연장하려고 애썼고, 결국 가야 되었을 때 “안 가 집, 집에 안 갈래. 집에 가기 싫어.” 하며 떼를 썼다.
A선생님은 “나는 네 마음을 알고 있어.” 라고 말해준다.
“우리 놀이방.” 이라고 말하며 딥스는 집으로 간다.
놀이방을 돌아보며 하나하나 눈에 담는 작디 작은 딥스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딥스가 내게 왔을 때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아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빨리 아이를 구해주고 싶었고, 아이를 괴롭히고 문제를 빨리 제거해주고 싶었다. 아이가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기를 망설이자 제촉했고, 아이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아이가 이제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아이에게 증오와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너무 쉽게 비밀을 털어놓은 자기 자신과 그렇게 만든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버렸다. 한편으론 나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증오하게 된 것이다.

아이에게 있어 발달의 불균형은 비극일 수 있음을 본다. 비록 아이가 어떤 분야에서 천재적인 면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딥스는 지적인 면에서는 천재적이었다. 그러나 정서적 만족감은 아주 낮았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과학자이고 어머니는 의사였다. 그러나 딥스의 출현은 이 부부에게 재앙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다. 고상하고 평온해 보이는 이 가정은 사실은 병들어 있었고, 상처는 깊게 곪아가고 있었다.

“안녕 A선생님, 목요일에 다시 올 거에요. 매주 목요일이 있어요.”
딥스는 그렇게 변해갔다. 그리고 딥스의 놀이치료를 통해 딥스의 부모도 치유받게 된다.

“선생님, 안녕!”
그리고는 긴 복도를 빠르게 달려가 두 팔로 엄마에게 안겼다.
“엄마! 엄마가 좋아요.”
딥스는 엄마에게 안기며 소리쳤다.


나는 마치 내가 딥스의 엄마인양 한참 울었다.
몇 년 전 나의 딥스는 정중하게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사과했다.
자신으로 인해 내가 느꼈을 좌절과 고통을 그때는 몰랐다면서. 지금의 자신의 삶은 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면서...

많은 경우 부모 자신이 치료에 참여하지 않는 한 어린이의 치료는 대부분 어려워진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가 이 때문에 치료를 거절당했는지 모른다.

그렇다. 또 많은 경우 아이의 상처는 부모로 인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아이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이 부모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아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아이의 삶을 조종하고 간섭하고 정서적 학대를 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딥스가 놀이방을 떠난 후 2년 반이 지난 어느 날, 딥스와 A선생님은 이웃이 되어 재회한다. 딥스는 명랑하고 유쾌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분이 누군지 알겠니?”라고 묻는 아빠에게 딥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빠, 여기 계신 이분은 저의 제일 첫 친구였어요.”
“A선생님, A선생님이란 특별한 친구를 위한 특별한 이름이에요.”


A선생님은 친구의 퇴학조치가 부당하다며 학교측에 보낸 공개서한이 실린 학교신문을 통해 딥스를 다시 만난다. 열다섯 살이 된 딥스가 쓴 공개서한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지를 지닌 딥스’

나의 딥스는 지금 서른다섯 살이다. 10년이 걸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몇 년간 전공을 살려 일하다 다시 자신이 자란 보육원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돌보면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지금은 해외봉사단으로 캄보디아에서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책 속의 길] 77
김명희 / 대안가정운동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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