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거부하는 매체들

평화뉴스 기자
  • 입력 2013.10.3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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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총 50년사>, <대문>..."맥락 살리고 작은 사실도 확인 필요"


정통성 송두리째 무시


교학사 역사교과서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반포를 외면했고, 독도 명칭을 우리 지도에서 빼버렸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격하했는가 하면 대한민국의 법통을 왜곡해버렸다. 한마디로 국가, 국민, 민족의 정통성과 그 전통성을 송두리째 무시했다. 그 자리에 일본의 우월성, 독재와 군사반란을 채웠다. 일본왕과 히틀러에게 바치면 딱 좋을 ‘역사교과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유력 일간신문이 해석을 하고 나섰다. ‘민족이냐-국가냐’고  2분법을 휘두른다(중앙일보, 2013. 10. 21. 「기획」). ‘교학사 교과서’ 사태에 대해 정의의 여신(그리스 신화 속의 ‘디케’)인양 해석을 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셈이다. 누가 이 신문에 ‘디케’의 저울을 맡기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중앙일보> 2013년 10월 21일자 4면(기획)
<중앙일보> 2013년 10월 21일자 4면(기획)
<중앙일보> 2013년 10월 21일자 5면(기획)
<중앙일보> 2013년 10월 21일자 5면(기획)

사실은 빠지고 ‘맹목’만 활개

중앙일보의 이날 「기획」은 방법이야 어떻든 모로 가더라도 한양만 가면 된다는 재벌의 본능적 목적만능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중앙일보와 같은 사고방식을 찬찬히 파고들면 거기에 사실(事實, 史實)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예를 들어본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을 저지르다 발각(1966)되자 아예 한국비료를 통째로 ‘헌납’(1967)하는 해법을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빼앗은 박정희 세력에게 제시해서 넘기고, 이병철은 ‘헌납’한 한국비료를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따라 민간기업에 입찰불하되자 한국비료를 다시 사들인다. 거기엔 총으로 빼앗은 권력과 부정으로 쌓아올린 권력 간의 ‘거래’가 있을 뿐이다. 중앙일보의 태생적 본능은 왜 중앙일보를 창간했는가 하는 문제로 수렴된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 염탐이었다는데 토를 달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중앙일보가 ‘디케’의 저울을 맡았다고 생각한다?

토호 정체성 드러낸 상징

‘미디어창’은, 사실을 무시하고 맥락을 외면하는 데는 지방언론도 예외가 아님을 보게 된다. 우리지방 일간신문이나, 전파가 국민의 것임에도 국민의 진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실 보도를 외면하거나 기를 쓰고 축소한 ‘지방언론’의 행적이 그것을 잘 증명한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제·수도자들, 안동교구 사제·수도자들이 대구교구 창설 이후 100년 만에 처음으로 거행한 ‘대구경북 천주교 사제·수도자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2013. 08. 14.)을 매일신문은 독자가 눈길에서 벗어난 간지 구석에 작게 다뤘고,  KBS대구는 뉴스보도 맨 끝에 올렸고, TBC대구방송은 아예 다루지 않았다. 독자, 시청자를 들러리로 밖에 보지 않는 보도태도는 아무나 취할 태도가 아니다. ‘대구경북 천주교 사제·수도자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은 우리 지방 인쇄·전파매체가 ‘토호’인가 아닌가 하는 정체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 띄엄띄엄 독자를 찾아가는(하지만 그만큼 열독하는 독자층이 있게 마련인데, 예를 들면 연간 간행물이나, 연사(年史)라는 이름의 기록물, 또는 월간 잡지 형태의 간행물 같은 것) 여느 매체는 어떤가?

거기엔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 사건들이 있다. 그 단골들은 수년 동안, 아니면 수십 년 간 변함없는 표현으로 옷을 입고 등장한다. 중앙일보가 사실을 무시하고 ‘해석’으로 대중몰이를 하려 한다면 이런 매체들은 ‘죽으나 사나’다(그것을 가리켜 골목에 사는 시민들은 ‘상투(常套)’라고 말한다). 거기엔 조건반사적인 ‘반응’만 있는 것 같다.

'대구예총 50년사', 변한 게 있기나 하나?


이제 그 인물/사건들을 찾아가 본다.
최근 대구문화재단(이사장 김범일 대구시장)은 김정길 대표이사가 지난 3월 20일 임기의 1/3을 채우지도 못하고 TBC 사장으로 옮겨간 이후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대표이사 자리를 문무학 예총 대구회장으로 채웠다(대구예총 회장 자리는 문무학 씨가 임기가 끝나는 올 연말까지 겸임할 것이라고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김 전임대표이사의 선정을 둘러싸고 난무했던 대구시장의 ‘인사난맥’도 그렇지만 문무학 대표이사가 대구 예총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발간한 『대구예총50년사』를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이미 1993년 12월에 예총 대구직할시지회가 『대구예술30년사』란 이름으로 펴냈다. 『대구예총50년사』는 그 뒤 20년의 긴 세월이 흐른 뒤에 발간(2012. 12.)됐다. 이 책이 발간됐을 때의 열쇠 말은 ‘대구 예술계의 변천사’ ‘시대별 각 예술 장르의 명암’ ‘날카로운 목소리와 비판’ 등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앞서 나온 책과 비교해가며 읽은 느긋한 독자들은 말한다. “변한 게 없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5.16 혁명’이라니. 정말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분방하게 활동해온 자취를 이렇게밖에 못 쓰나?”

그래서 대구문인협회 편부터 비교해봤다. 『대구예술30년사』와 『대구예총50년사』는 ‘제4장 문인협회’ ‘문인협회 약사’와 ‘대구문인협회’ ‘Ⅰ. 총설’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용이 거의 같다. 맥이 같고 토씨가 같고 다룬 인물들이나 사건이 같다. 베껴 쓰지 않고는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다른 것도 있다. 『죽순』 창간호, 『아동』 창간호, 『전선수첩』의 작은 사진이 실려 있는 게 이전 책에는 없는 것이다. 그 정도다.

이번엔 두 책의 사진협회 편과 사단 편을 본다. 최계복, 안월산, 홍사영, 구왕삼, 신현국…. 그런데 서술 내용에 큰 변화는 찾을 수 없다. ‘변천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던 발행 당시 기자들의 열쇠 말은 이번에도 실망으로 끝났다. 무엇보다 맥락을 찾을 수 없다. 무슨 크고 신통한 맥락이 아니다. 대구 사진계의 선도역을 맡았던 그 인물들이 살던 시대,  그 인물들이 어깨를 겯고 살아간 이웃들의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참고문헌을 들여다봤다. 물론 인터넷도 포함된다. ‘장병직’, ‘최계복’…. 참고문헌을 들여다보다가 발견한 것 한 가지-이 사람들이 경성일보라는 신문사를 통해서도 활동한 것을 알게 됐다.

『대구예총50년사』에서 찾을 수 없었던 그 맥락을 느껴볼 수 있을까 해서 경성일보를 찾았다. 박창원, 김태욱, 최인진…제 씨의 책과 글도 찾았다. 이게 웬일인가. 최인진 씨가 최계복과 관련해 어른어른하게 묘사한 보도 연월일을 추리를 거듭해가며 찾아갔더니 최계복이 있었다. 그런데 그 외의 인물들-대구사진가들이 나오는 게 아닌가. 뜻밖의 소득이다 싶었다. 그런데 어라! 연사(年史)에 ‘장병직’으로 기록된 사람이 ‘張炳眞’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래서 1939년 경성일보에 실린 기사를 유심히 읽어  내려갔다.

최계복 관련 스토리 가지각색


뜻밖이었다. 최계복이 응모한 경성일보 사진공모전의 이름은 ‘칙제(勅題) 조양영도(朝陽映島), 인화현상모집(印畵懸賞募集)’이었다. 조양영도(朝陽映島)? ‘조양’은 아침 햇살, 즉 욱일승천을 가리킨다. 경성일보가 일문 신문이고 주 독자층은 일본인이다. 욱일승천은 일본(군)을 가리킨다.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는 국가. 영도는 비칠 영, 섬 도. 일본의 은택이 조선반도(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른다)에 비친다는 말이 아닌가(또는 떠오르는 태양이 섬나라 일본을 비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어느 것이나 식민지 조선은 간 곳 없고, 일본이 중심이 된다). ‘칙제’는 일왕이 사진촬영의 제목을 내렸다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일본의 지배는 영원하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기획된 사진공모전에 일본인들과 식민지 조선의 사진작가들이 응모한 것이다. 경성일보의 사고에는 경성일보사 외에 다른 기관이 공동주최한다고 돼 있지 않지만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전조선사진연맹이라는 일본인이 주도하는 사진작가조직체가 있었고 이 조직이 경성일보의 ‘칙제 조양영도’ 공모전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경성일보> 1938.12.6 '칙제 조양영도 인화사진모집' 사고
<경성일보> 1938.12.6 '칙제 조양영도 인화사진모집' 사고

다시 경성일보를 앞뒤로 훑어본다. 이 사진공모전 사고가 나가기 직전 일본군이 광동을 점령하고부터 한구 점령, 항일 세력 분쇄, 종군기자들의 전황 보고회…기사가 연일 이어진다. 사진 투성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지면은 사진으로 뒤덮였다(「황군 광동에 입성/항일의 아성에 일장기」 「광동 입성을/폐하에 주상」 1938. 10. 20. 1면), 「한구 돌입」(1938. 10. 26. 1면), 「황군 광동 점령」(1938. 10. 26. 호외, 2면 전면 사진판), 「무너진 항일의 기지」(1938. 10. 29. 면수 기록은 없음).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은 중일전쟁이 한창인데 평양 고구려성 발굴이나 백제 문화재, 경주 석탑, 농촌의 조선 여인 모습이나 시골풍정 관련 글, 사진, 그림 역시 줄을 잇는 게 아닌가. 우리가 여태 생각해오던 일제강점기 일제 지배의 모습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스럽게도 지금까지 최계복에 대해 쓰고 발표한 내용 가운데 일부는 신문기사와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본다.

'1등당선작' 오보

최인진 씨는 『대문』 2013 여름호에서 『최계복의 영선못의 봄』이란 제목으로 최계복에 대해 쓰고 있다. 최 씨가 『사진문화』를 발췌한 글의 일부는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20주년 전에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에서 열린 현상에서 「첨성대」로서 1등 당선한 것과…’

그런데 경성일보사 ‘칙제 조양영도’ 인화현상모집의 당선작 발표 기사에는 1등에 최계복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참고로 이 전시에서 ▲특선은 제1석, 제2석, 제3석 1명씩, ▲준특선 5명, ▲입선(가작) 50명이 발표되었다. 최계복은 경성일보사 사진공모전(인화현상모집)의 준특선 5명 중 1명으로, ▲입선 50명 가운데 사진을 여럿 응모한 결과 두 번 뽑혔다. 대구에서 입선한 사진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준특선-대구부 동문정 우하의덕(右賀義德) 대구부 경정 1의 102 崔季福 ▲입선-대구부 경정 1의 102 최계복 대구부 내당동 1035 鄭雲相 대구 덕산 110 吳麗松 대구 삼립정 4의 2 張炳眞 대구 동운정 360 朴三植 대구 동운정 4의 2 張炳眞 대구 경정 1의 102 崔季福 대구부 동문정 팔목영지우(八木永之祐)

여기 나오는 최계복, 정운상, 오려송, 장병진, 박삼식은 이후 대구사진계에서 크게 활동하게 되는 것은 사진 관련 연감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문제는 ‘지금으로부터 20주년 전’ 즉 1938년경에 경성일보사의 현상 공모전에 최계복이 1등을 한 사실이 없다는 것. 이것은 사실 확인이 안 돼 왔다는 것을 말한다(『사진문화』의 글을 발췌, 인용한 최인진 씨의 잘못이 아니다). 다행스럽다고 할까, 혼란스럽다고 할까. 경성일보의 당선작 발표 기사에는 없는 최계복의 입상작이 「첨성대」라고 『사진문화』 발췌문에서는 밝히고 있는데, 최인진 씨의 『영선못의 봄』(최계복 사진집)에서는 다른 조직의 명승고적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된 작품이라고 했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최계복 사진집
최계복 사진집

필자는 작다면 작은 기사 읽기를 통해 ‘장병직’의 이름이 ‘장병진’이란 것을, ‘최계복 1등’이 준특선 5명 중 1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 그런데 말이지 『대구예총50년사』나 『대문』은 어디에 내놔도 누구나 다 아는 큰 기관의 간행물이 아닌가. 전문가들, 실무자들의 조직인데도 개인의 작은 노력으로 확인한 것을 대중에게 읽히는 간행물에서 ‘오보’한다는 것은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이 난 김에 덧보탤 것은 최계복의 해방 이후 행적이다. 해방 당시 대구에서 발행된 여러 신문들은 최계복이 영화에 관여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즉, 대구의 뉴스영화 전문 영화사인 ‘10월영화공장’이 1945년 10월에 창설됐는데, 그명칭이 10월영화공장→10월영화사→조선문화영화사로 바뀌고 사장도 항일운동가/교사/한의사/양의사인 이원식에서 최계복, 최성각으로 바뀐 뉴스영화, 문화영화 제작회사에 관여(사장)했고 정인교와 함께 촬영까지 담당한 사실을 대구예총이나 대구문화재단의 어떤 책자나 글에서도 외면하고 있다. 아직은 대구 사진협회나 사단은 사실 확인과 발굴 작업을 좀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최계복이 백두산을 등정해서 수십 장의 사진을 남긴 사실은 특기할 일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특히 당시에는 백두산 일대는 일본경찰이나 일본군에게는 특수 지대였다. 당장 백두산과 만주 일대를 근거지로 한 항일연군, 독립군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고,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만주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는 대가로 간도(백두산 근처의 넓은 지역)를 청나라에게 넘겨버린 외교/국경변경 문제에 대비해야 했다. 그런데 최계복의 백두산 등정 촬영이 조선총독부의 기획으로 진행됐는데도 최계복의 산악 등정/여행과 관련지어 또는 심신단련 목적을 강조해서 기술한 것은 주관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기록사진의 개척에 무게를 둔 김태욱 씨의 글은 그런 점에서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최계복이 대일본국방부인회 대구지회 회원이 사격하는 장면(「후방의 사격훈련」)이나 욱일승천기가 요란한 대구공항 개장 현장(「환성을 안고/대구비행장 개장」, 역사적 명소인 달성을 대구신사터로 바꿔놓은 현장(「신사의 아침」)을 부각해서 촬영한 의도는 무엇이었나? 군사, 종교(정신) 지배를 통한 일제의 위상(偉像)을 강조한 것이 최계복의 사진매체를 읽은(관람한) 독자(관람객)에게 미쳤을 영향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답/해설은 최계복 관련 어떤 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또 하나. 경북사진문화연맹이란 단체가 최계복, 계철순 등의 주도로 1945년 9월에 이미 조직돼 활동하고 있었고, 박창원의 학위논문을 통해 이 사실이 학계에 보고됐는데도(2012, 8월) 훨씬 뒤에 나온 앞의 두 간행물에는 그 사실이 언급돼 있지 않다. 역량 부족일까, 눈이 어두운 걸까.

현제명을 위한 변명에도 맥락 실종


대구문화재단의 계간 『대문』(2013 여름호)은 『대구예총50년사』와 동일하게 맥락을 잃고 있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대문』은 첫머리 글 「캐리커처 에세이 대구 예술인을 찾아서」에서 「작곡가, 성악가 현제명 1902~1960」를 엄정행 씨의 글로 주로 그의 가곡인생에 초점을 맞춰 다뤘다.

그런데 캐리커처 에세이 작가는 이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뛰어난 천재지만. 친일행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37년 5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한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여기에는 일본과 조선의 문예인 30여명이 활동하였다. 그해 6월에 발생한 독립계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를 계기로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후학을 위해 경성음악학교를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준 현제명 선생과 같은 분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맥락을 잃었다는 것은 현제명이 어떤 친일단체에 가입한 것도 그렇지만 더 큰 것은 현제명이 황도, 황민화-즉 우리민족성을 없애고 일본인으로 만들고 일본에 복종시키는 일에 해방의 그날까지 매진한 사실 때문이다 (「대문」은 2012 가을호에서 손태룡 씨는 「한국 근현대 음악의 개척자, 박태준」에서 박태준의 활동만 다뤘을 뿐. 춘원 이광수가 가사를 붙인 「지원병장행가」를 작곡하는 등 친일의 첨병에 선 활동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박태준의 그런 음악활동(?)이 현제명의 그것과 다를 바 있을까?).

경성일보와 짝을 이뤄 우리 민족의 재산과 생명을 좌지우지한 선전대 역할을 한 매인신보의 기사를 보면 엄정행의 위 글은 사실과 다르다. 매일신보 1937년 5월 2일 3면에는 「조선문예회 발회식/각 방면의 권위자를 망라하야/2일 경성“호텔”서 결성」했다고 돼 있다(조선문예회발회취의서는 5월 1일에 발표)
조선인으로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윤성덕, 조선일보사 방응모, 상업은행 박영철, 이화여자전문학교 박경호, 매일신보사 이상협, 이왕직 이종태, 숭실전문학교 양주동, 이왕직 함화진, 정악전습소 하규일, 연희전문학교 현제명, 홍영후(홍난파), 최남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김영환, 경성중앙방송국 김억 등이다. 이들은 조선문예회를 조직하자마자 7월 11일 밤 신작가요발표회를 한다(매일신보 1937. 7. 12. 2면, 「조선문예회/신작가요발표/제1회로 십일일 밤」. 출연한 인물은 현제명, 정훈모, 산현공(일본인), 영목미좌보 등이었는데, 그 취지는 ‘국민정신의 작흥, 국체관념명증(國體觀念明徵)에 일조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민족에게 일본정신을 심어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조선문예회를 조직하고 일관된 목표 아래 활동하고 있는데(조선문예회의 조직목적은 ‘일본황민의 정신작흥과 국체관념의 명증’이다) 대동민우회에 가입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친일하는데 조선문예회보다 대동민우회가 더 비중 있다는 말인지(현제명은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구속되지는 않았다).

해방 그날까지도 “일본을 위해서”


현제명은 이후 경성음악협회 설립하고 간사(이종태, 죽정춘자, 대장용지조, 김영환, 안등방량, 길택실 등과 함께)로 활동한다(매일신보 1938.  10.  31.  2면, 「음악문화를 위하야/내선음악가 협동/경성음악협회 출현」). 현제명의 친일 활동은 소극적인 참여가 아니라는데 심각성이 더하다. 현제명은 이승학, 김자경, 차정순과 함께 박태현이 지휘하는 경성취주악단의 연주에 맞춰 군가, 애국가(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불렀다. 매일신보는 현제명 등의 ‘국민가요’ 활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매일신보는 그 상황을 ‘국민의 사기를 더욱 북도두기로 하엿는데 벌서부터 일반의 기대는 물 끓듯 하고 잇다고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날의 강연은 장덕수가 맡았다(매일신보, 1942. 1. 22. 조간 2면, 「熱과 力의 軍歌, 舌戰/23일밤 대화숙 주최 군가강연의 밤」).

경성후생실내악단 설립 전후 음악단체

현제명, ‘우리들은 부르심을 밧자왓다’

현제명의 친일활동은 갈수록 열기를 더했다. 한 예로 현제명은 1943년 8월 1일부터 시행된 징병제를 기념해서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야외 음악, 영화의 밤에 출연해서 ‘항공일본의 노래’ ‘대일본의 노래’를 불렀고 이인범, 김천애와 함께 ‘반도청년의 노래’ ‘우리들은 부르심을 밧자왓다’를 불렀다. 물론 이인범, 김천애는 독창, 합창 등으로 징병으로 끌려나가는 우리 동포들이 일본을 위한 총알받이가 되도록 하라는 노래를 부른 것은 물론이다(매일신보, 1943. 8. 3. 2면, 「야외음악, 영화의 밤/징병 축하하야, 금야 경성운동장서」).

이틀 뒤에는 「2천5백만의 대합창/금일 반도 皆兵의 노래 발표회/오후 4시 부민관서(매일신보, 1943. 8. 3. 2면)가 열렸다. 이날 매일신보는 ‘특히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찬조출연으로 건전명랑한 국민개창의 대회합을 열기로 되엿다’고 보도했는데 경성후생실내악단은 제1차, 제2차 모두 현제명이 참가했다. 이후 현제명은 호남지방 가창지도대지도자로도 참가한다(매일신보, 1943. 9. 16. 3면).

앞서 현제명이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제1차, 제2차에 모두 참가했다고 했는데 ‘전시하 직역에서 국민 사기 앙양을 위해’ 조직된 경성후생실내악단은 1942년 5월 1일 김생려 주동으로 1기가 출범한다. 이 악단의 활동 이력을 보면 1942년 6월 11일부터 1944년 3월 24일까지 모두 열세 차례에 걸쳐 ‘후생음악’ 활동을 한다. 공연횟수는 무려 112회. 7만8천750명이 관람했다고 조선총독부 기록은 전하고 있다. 1943년 2월 24일 ‘국민음악회’에 현제명은 이인범, 이유성, 김천애, 김생려 등과 함께 출연한다. 1기는 김생려, 이유성 등이 일본-만주 음악교류를 명분으로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김에 따라 1944년 3월 해산한다.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현제명

현제명은 그러나 그치지 않았다. 1944년 5월 이번에는 현제명을 이사장으로 하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출범한다. 「경성후생실내악단 신발족」 제목의 기사(매일신보, 1944. 5. 15. 2면)는 현제명이 최고위직인 이사장을 직접 맡았다. 주로 생산공장과 광산 노동자들을 위문하는 활동을 벌인다고 보도하고 있다. 황민화 정책을 위해 노래하고, 군가를 작곡하고, 아예 이사장이 돼 총괄지휘한 것이다. 노동은 교수의 말대로 현제명은 어디로 보나 ‘제국의 음악가’다. 일본제국 음악의 핵심이었다. 우리민족의 음악가와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아득할 뿐이다.

<매일신보> 1943. 12. 26. 3면. 김활란(창씨명 천성활란) 이화여전 교장이 "지원병으로 입영하는 남자 학도에 지지않게 황국여성으로서 책임을 완수하자"고 이화여전이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자양성기관으로 바뀌게 된 것을 환영하는 대담을 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오른쪽 여자 얼굴이 찍힌 부분)
<매일신보> 1943. 12. 26. 3면. 김활란(창씨명 천성활란) 이화여전 교장이 "지원병으로 입영하는 남자 학도에 지지않게 황국여성으로서 책임을 완수하자"고 이화여전이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자양성기관으로 바뀌게 된 것을 환영하는 대담을 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오른쪽 여자 얼굴이 찍힌 부분)

현제명, 홍난파, 이흥렬, 김생려, 김천애, 이인범, 이종태, 박경호 등 수 많은 음악인들이 친일을 넘어 일본의 황민화에 앞잡이가 되고 있는 동안 다른 문화인들도 그 길을 갔다. 현상윤, 김활란, 김성수, 방응모 등이 우리 청년들을 학병으로 내모는 등에 앞장을 섰다. 1921년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로 시작되는 찬송가 가사를 쓴 김활란은 22년이 지난 1943년에는 ‘반도의 학도들은 영예의 입영 길이 열렸으나 여학생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참렬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자가 되는 것은 황국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태도를 180도 바꿔버렸다. 이미 여자정신대 동원령이 내렸고, 여자정신대의 노래가 국민가요라는 이름으로 거리에서 왱왱거리던 때였다. 김활란 같은 여성지도자들이 연성시킨 여학생들은 그 뒤 어떻게 됐을까?

홍보정신대 맡아

조선문예회 회원들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은 조만간 선전전의 홍보정신대로 개편한다. 「선전전의 필승체제/문화전사들 홍보정신대를 결성」기사(매일신보, 1943. 12. 25. 3면) 기사는 현제명, 홍난파, 이흥렬, 김활란 같은 인사들의 활동이 수많은 조선민족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만들었고, 더 많은 이웃들을 그렇게 만들도록 하는 체제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는 직업상의 홍보였지만 그 홍보가 만든 분위기에 갇힌 이웃들은 반항 한마디 못하고 징용으로, 징병으로, 학병으로 전선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홍보정신대는 이렇게 구성됐다. 조선 주재 일본군이 주도하는 홍보정신대의 홍보역을 맡아 실천한 조직은 다음과 같다.

◇제1부 / 조선문인보국회, 조선미술가협회, 조선보도사진협회, 조선사진가협회,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조선영화배급사, 조선음악협회, 조선축음기음반제작협회, 조선취주악단연맹(준비중),
◇제2부 / 경성중앙방송국, 조선신문회, 조선연맹기자회, 조선출판회
◇제3부 / 조선선전미술협회, 조선만화인협회, 조선연극협회, 조선이동전협회, 조선총력사상보급협회, 조선문화환등주식회사


<매일신보> 1943.12.25.3면 「선전전의 필승체제 / 문화전사들 홍보정신대를 결성」보도
<매일신보> 1943.12.25.3면 「선전전의 필승체제 / 문화전사들 홍보정신대를 결성」보도

물론 여러 부문에서 더 많은 조직들이 홍보정신대 활동을 했다. 종교인들의 활동은 매우 조직적이었다. 그 맨 꼭대기에는 일본군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저항한 문화·예술·종교인들도 있다. 기독교 신자 함석헌, 김교신, 영화감독 이규환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대구에는 김관제(한약방 경영), 김창숙, 채충식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이규환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덧 전쟁말기에 접어든 일제는 드디어 최후발악으로 그들의 앞잡이(일본인)들을 중추로 진용을 꾸민 이른바 「조선영화통제회사」라는 것을  설립해가지고 민간인의 영화제작을 법령으로 금지시킨 다음 대부분 기술부문의 영화인들을 흡수해서 주로 친일정신을 고취시키는 일본식 조선영화를 만들기에 급급하게 되자 몇몇 뜻있는 영화감독들은 자취를 감추어 행방불명이 되기도 하고 날품팔이 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징용판에 끌려가서 고역을 치르게 되고 보니…


맥락, 사실 놓치면 ‘악종’


대구의 거대 문화·예술단체의 간행물은 맥락을 찾아야 한다. 띄엄띄엄 읽지만 긴 안목의 전문가들이 독자층이다. 여론주도층이기도 하다. 그들을 위해 시간과 공간/지역과 관련 있는 배경을 제공해야 한다. 2분법의 주관성 강한 스토리는 지역 문화를 후퇴시키기 딱 알맞다. 사실 확인 작업은 필수적이다. 일제강점기 활동을 못보고, 오보하고 한다면 지금 현재의 활동도 후배 문화예술인들은 못 보고, 오보하기 쉽다. 악순환이다. 지역 정체성의 큰 종기(악종)가 아닐 수 없다.

맥락은 살리고, 사실은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전문매체와 전문매체 종사자들이 할 일이 아닐까. 거래(권언유착)는 금물이다.






[평화뉴스 미디어창 253]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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