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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언어, 위험한 사상: 에스페란토와 아나키즘
[다산연구소] 정지창 /『위험한 언어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
2013년 12월 27일 (금) 14:28:46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1888〜1968)의 호가 벽초(碧初)인데 이것은 ‘최초의 청록인’(Verdulo Unua), 즉 ‘조선 최초의 에스페란토인’을 뜻한다. 청록색은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색으로 에스페란토 단체들은 청록색 바탕에 왼쪽 귀퉁이에 청록색 별이 그려진 깃발을 사용한다. 청록색은 평화를, 별은 희망을 나타낸다. 벽초는 1910년 중국 상해에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 흔히 김소월의 스승인 안서(岸曙) 김억(Verda E. Kim, 1896〜?)이 1916년 조선 최초로 에스페란토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벽초가 그보다 먼저 에스페란토를 익힌 선배로서 1923년에 발간된 김억의 『에스페란토 독습』에 에스페란토로 서문을 썼다.

  벽초는 1924년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매주 월요일 지면에 ‘에스페란토 고정란’(담당자는 이광수)을 만들어 국내외 필자들의 글을 에스페란토로 실었다. 기고자 가운데는 Verda Kim(김억), Unu Esperantujano(‘한 에스페란토 회원’. 박헌영으로 추정) 등 조선인과 함께 러시아인 예로셍코(V. Erosenko), 세리세프(I. Serisev), 일본인 K. Osaka도 끼어 있었다. 같은 시기에 조선일보에도 에스페란토 원문들이 실렸다. 1920년 창간된 문학동인지『폐허』의 표지에는 ‘廢墟’라는 한자와 함께 에스페란토로 ‘La Ruino'라고 표기했다. 1922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개벽』도 ‘開闢’ 이라는 한자와 함께 ‘La Kreado'라는 에스페란토 제호를 붙였다. 1925년에 창립된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즉 ‘카프(KAPF)’는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라는 에스페란토 표기의 약자이다. 이처럼 1920년대에 에스페란토가 식민지 조선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한글이라는 민족어를 말살하고 일본어를 강제하는 상황에서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이 일종의 문화운동이자 민족해방운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에스페란토 운동은 한글 지키려는 문화운동

  1924년 11월 ‘조선 에스페란티스토연맹’의 창립선언문은 조선어 대신 일본어를 강요하는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이 선언문에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2명도 같이 서명했다. 이들은 자국민은 자국어를 사용하고 다른 민족과의 소통에는 중립적인 국제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는 에스페란토 창안자 자멘호프의 보편적 사해동포주의(코스모폴리타니즘)에 공감하였기에 국적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 에스페란토 동지로 연대하였던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종족에 대한 저주받은 편견과 장벽을 제거하고, 진정한 사랑과 형제애로 하나가 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자애로운 인류 구성원들은 이미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황당한가를 지켜보았다. 모든 민족의 고유 언어는 각각의 민족을 위해 존재하고, 모든 인류를 위해서는 오직 에스페란토만이 존재해야 한다.
  (울리히 린스 지음, 최만원 옮김,『위험한 언어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 갈무리 2013, 183쪽. 이 선언문은 동아일보 1924년 11월 24일자에 실린 것이다.)

   
▲ 『위험한 언어 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고난의 역사』(울리히 린스 저 | 최만원 역 | 갈무리 |2013)
  당시 일제 식민 당국은 일본인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만, 대만인이나 조선인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은 ‘위험한 사상’에 빠져드는 첫걸음으로 보았다. 일본인은 미래 인류의 평화를 위해 단순히 세계공용어로서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이지만, 대만인이나 조선인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은 일본어를 배척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에스페란토는 ‘위험한 언어’로 낙인찍히고, 만주사변(1931년) 이후에는 에스페란토 활동이 금지되었다. 중일전쟁(1937년) 다음 해인 1938년 일제는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시키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사들을 체포하는 한편, 길거리에서도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처벌했다. (앞의 책, 184〜186쪽 참조.)

  평화·평등·희망의 언어, 에스페란토의 탄생과 박해


  에스페란토(Esperanto)란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887년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 안과의사 자멘호프가 모음 5개, 자음 23개로 구성된 에스페란토를 만들어 발표하면서 ‘에스페란토’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어느새 그 언어의 이름이 ‘에스페란토’로 굳어진 것이다. 에스페란토는 이후 급속하게 보급되어 널리 사용되었으나 거의 언제나 ‘위험한 언어‘로 취급되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제정 러시아와 나치 독일,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에스페란토는 금기의 언어였고 에스페란토 사용자(에스페란티스토)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체포와 감금, 처형을 감수해야 했다.

  에스페란토를 발표한 직후 자멘호프는 제정 러시아의 히브리어와 이디쉬어 검열관이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에스페란토를 소개하는 책자들과 함께 『햄릿』의 에스페란토 번역본을 발간할 수 있었고, 곧 의사, 교사, 작가 등 교양있는 도시지식인들이 에스페란토에 매료되었다. 어떤 정치적 견해도 표현하지 못하던 짜르 독재 치하의 러시아 지식인들은 에스페란토에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이상주의의 안식처를 찾았다. 톨스토이가 에스페란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자기 작품의 무상번역을 허락한 것은 에스페란토 보급에 도움을 주었지만, 톨스토이 지지자들과 에스페란티스토들의 협력을 두려워한 러시아 당국은 곧바로 국내의 에스페란토 출판을 금지시키고 독일에서 발간되는 에스페란토 기관지 반입도 금지시켰다.

  러시아의 사정이 악화되면서 에스페란토는 1900년대 초반에 프랑스 등 서유럽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상주의적 목표를 가진 동구권 수용층과는 달리 과학과 상업, 여행 등 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에스페란토를 활용했다. 자멘호프를 비롯한 초기의 에스페란토 운동가들도 언어민족주의와 각국 정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정치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순수한 인도주의적 언어운동임을 강조했다. 1905년의 제1차 세계에스페란토 대회에서는 에스페란토주의가 “전세계에 중립어의 사용을 확대학기 위한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자멘호프도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인간 대 인간의 교류와 공존을 표방한 이른바 ‘인류인주의’(Homaranismo)를 주창하면서 상호적인 우애, 평등, 정의의 원칙 위에서 모든 사람들과 종교가 각각의 특성을 간직한 채 서로 만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포그롬’이라 불리는 유대인 대량학살이 벌어지자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가 편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에 대해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침묵하기보다는 상호 연대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모든 인간의 평등과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에스페란토운동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1920년 1차 국제연맹 총회에 벨기에, 브라질, 체코, 중화민국, 아이티, 인도, 이탈리아, 콜롬비아, 페르시아, 남아공화국 등 11개국이 “모든 나라의 어린이들이 적어도 두 개의 언어, 즉 모국어와 국제적 소통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에스페란토를 배우도록 하자는 희망”을 표시하고, 국제연맹 사무총장에게 각 회원국들이 공립학교의 에스페란토 교육 결과를 보고해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에스페란토에 우호적인 결의안이 통과될 경우, 프랑스어가 외교무대에서 영어에 밀릴 것을 우려한 프랑스의 완강한 반대로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앞의 책, 62쪽 참조.) 이 무렵 에스페란토는 로맹 롤랑, 마하트마 간디, 에드바르트 베네시 체코 대통령 등의 지지를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에스페란토가 “전통도, 문학도, 지적인 가치도 없는, 가난뱅이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언어”라는 근거없는 이데올로기적 비난을 받았다. (66쪽 참조) 특히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유럽의 남동부 국가들에서 에스페란토는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의 언어라는 근거 없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는데, 그 진짜 이유는 “첫째 에스페란토가 시민들에게 박제화된 교육과정에 대한 혼란을 초래하고, 둘째,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이 외국에 대해 알게 되면서 독재자들의 자국 통제를 어렵게 하도록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앞의 책, 87쪽)

  히틀러: “에스페란토는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의 언어”
  스탈린: “에스페란토는 쁘띠 부르주아와 세계주의자들의 언어”


  그러나 에스페란토에 대해 가장 극렬한 비난을 퍼붓고 탄압에 나선 것은 히틀러였다. 그는 집권하기 전부터 에스페란토가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의 언어라고 낙인을 찍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과 독일 점령지에서 에스페란토 사용은 금지되고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독일군이 폴란드에 침공한 직후 자멘호프의 남아 있는 가족들도 총살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었다. 살라자르와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장기 집권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도 에스페란토는 독일에서처럼 탄압을 받았다.

  나치스가 에스페란토를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의 언어라는 이유로 단죄했다면, 공산혁명 이후의 소련에서 에스페란토는 크게 환영받고 장려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실제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에 에스페란토에 대한 검열과 탄압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소련의 저명한 작가 막심 고리끼도 에스페란토를 학교의 선택과목으로 채택하는 것을 찬성했고 당국도 에스페란토에 호의적이었다. 1925년에는 에스페란토 기념우표가 발행되고 에스페란토를 이용하여 사회주의 체제를 해외에 홍보하기 위한 대대적인 펜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투옥되고 해외에 소련 노동 현장의 부정적인 실상이 새어나가자 에스페란토에 대한 호의는 의혹과 경계로 바뀌었다.

  스탈린이 절대권력을 장악한 다음 1937년부터 에스페란티스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처형이 벌어졌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소련 에스페란티스토동맹’ 회원으로 위장하여 암약한 국제 간첩이라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당시 소련 당국이 작성한 숙청대상자 명부에는 반정부 활동가나 교회, 종교 분야의 활동가, 외국에 친구나 친척이 있거나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 우표수집가들과 에스페란티스토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숙청대상자를 지정하고 숙청을 지시한 것은 바로 스탈린 자신이었다.

  이 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람시, 스탈린, 마르의 언어이론들과 ‘소련 에스페란티스토동맹’ 이론가들의 이론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왜 소련이 에스페란토를 “쁘띠 부르주아와 세계주의자들의 언어”로 몰아 탄압했는지 납득할 만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스탈린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기치를 내걸면서도 실제로는 대러시아주의라는 일종의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스탈린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 아닌 조지아(그루지아)라는 변방 출신이고 다른 지도자들도 비러시아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수많은 민족과 인종, 종교, 언어로 구성된 소비에트 연방을 강력한 중앙통제로 묶어놓기 위해서는 러시아어라는 하나의 공용어만이 필요하다는 정책상의 필요 때문에 에스페란토를 금지시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인 영어에 대항하여 사회주의권의 언어인 러시아어를 지키고 확산시키기 위한 언어패권주의적 발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에스페란토를 국가와 민족,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들의 언어로 보고 금지, 탄압한 것은 아닐까?

  아나키즘의 언어, 에스페란토


  에스페란토는 1905년 이후 국제주의를 강조하는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제 폐지, 무계급·무착취 사회의 건설이라는 목표는 공유했으나 아나키즘이 개인의 자율성과 상호간의 자유연합체제를 중시하였으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하는 공산주의 볼셰비즘과 언제나 부딪치게 되어 있었다. 제1인터내셔날에서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마르크스와 정면으로 대립하였고, 볼셰비키는 아나키스트를 민족주의자보다 더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고 일차적인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기간에 볼셰비키들과 협력하여 누구보다도 열심히 싸운 아나키스트들은 혁명 이후에 가혹하게 숙청되었다. 스탈린 시대에 아나키스트이면서 에스페란티스토라면 일차적인 숙청 대상이 되었다. (안종수,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그리고 평화』, 선인 2006, 53〜55쪽 참조.)

  아나키즘은 그리스어 anarchie(통치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파생한 말로 서양에서는 디오게네스의 무소유 정신을 실천한 그리스의 견유(犬儒)학파를 아나키즘의 원류로 본다. 동양에서는 노자의 ‘무위의 정치’나 소국과민(小國寡民)론을 아나키즘의 원류라고 주장하면서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을 추구하는 최소국가정치론이나 지역공동체적인 지역자치와 직접민주주의의 정신으로 해석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중앙집중식 독재권력에 대한 거부 때문에 아나키즘은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모두에게 혐오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무정부주의나 무질서주의, 실현불가능한 낭만적 유토피아주의’로 매도되었다.

  아나키즘의 대표적 사상가인 크로포트킨의 저작들(『상호부조론』,『빵의 정복』등)이 소개된 20세기초에 일본과 중국, 조선 등 동북아에도 아나키즘이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수용되었다.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는 1932년 일본에서 아나키즘의 번역어로 사용된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사용되어 왔지만 정확한 번역어는 아니라는 주장이 많다. 스페인 내전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아나키스트인 유자명과 유림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에는 유림, 정화암, 하기락 등이 독립노동당을 결성했으나 5·16 쿠데타로 해산되었고 1972년 정치활동 해금 이후에 양일동, 정화암, 하기락 등이 민주통일당을 결성하여 총선에서 10%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요즘에는 무정부주의라는 용어 대신 아나키즘으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저항했다. 1925년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일본인 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천황 암살을 기도하다 체포되었고 1935년 이후에는 수백 명의 일본인 아나키스트들도 검거, 투옥되었다. 신채호, 이회영, 김원봉 등 중국에 망명한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은 테러와 폭탄투척 등 일제에 대한 무장 독립 투쟁과 함께 자본가 계급에 대한 민중혁명을 주장하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공산주의도 거부하여 두 세력 사이의 반목이 깊어갔다.(이른바 아나/볼 논쟁) 결국 1930년대에는 만주 지역의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김좌진 장군과 아나키스트인 그의 육촌 동생 김종진이 암살되기도 하였다.

   
▲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김성국 저 | 이학사 |2007)
  일제의 경찰은 조선의 항일인사들을 사찰할 때, 민족주의자,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의 세 부류로 나누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극렬분자로 찍힌 것은 테러와 무장투쟁을 감행하는 아나키스트였다. 1920년대 초 조선의 독립운동 진영에서 대세를 이루었던 아나키스트 세력이 점차 공산주의 세력에게 밀린 것은 소련이 조직적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했기 때문이지만, 일본 경찰이 ‘테러분자’인 아나키스트들을 일차적으로 탄압, 검거하고 사상투쟁에 치중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김성국,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 이학사, 2007, 참조.)

  1920년대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던 이회영, 신채호 등 독립투사들은 임시정부의 내분과 이승만의 외교론, 안창호, 이광수 등의 준비론에 실망하고 무장투쟁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특이한 것은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이 중국, 일본, 대만, 러시아인들과의 에스페란토 학습을 통해 아니키즘을 수용하고 교류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에스페란티스토 아나키스트인 예로셍코, 일본의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야마가 타이지(山鹿泰治)와 중국의 스푸(師復), 루쉰(魯迅), 바진(巴金), 그리고 한국의 이정규, 이을규, 정화암, 유림, 심여추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국적을 넘어서 아나키즘이라는 신념에 의해 끈끈한 동지애로 묶여 이미 국제주의자로서 세계의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제국주의 언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로서 소통하고 연대하였던 것이다.(안종수, 앞의 책 118〜119쪽)

 
  에스페란토와 아나키즘: 현실을 부정하고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는 이상주의


  1963년 6월 11일 남베트남의 틱꽝득(釋廣德) 스님이 정부의 불교탄압에 항의하여 사이공 미대사관 앞에서 분신자살하는 장면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유태계 독일인 에스페란티스토 알리스 하즈 여사가 1965년 3월 16일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82세의 나이로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항의하여 분신자살하고, 2년 후인 1967년 11월 11일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 유이 추우노신(由比忠之進) 씨도 미국의 베트남 침략과 일본의 사토(佐藤)내각에 항의하는 에스페란토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한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앞의 책, 66쪽 각주 69 참조.)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왜 평화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소신공양했을까? 에스페란티스토들은 근본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보다 인간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이상주의자, 즉 아나키스트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현실의 대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가의 횡포와 제국주의화에 (…) 투쟁했으며 그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타인들이 보기에 무모하기까지 한 개인들의 삶을 언제나 최전선에서 불살랐다. 민족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민족주의의 가장 신랄한 공격자였으며, 공산주의의 볼셰비즘 앞에서도 권력의 집중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성숙한 국가라고 보여지길 원하면서 안으로는 신격화된 천황제를 가지고 있는 일본국가에 언제나 그들의 야만성에 대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다. (…) 아나키즘이 파괴를 통한 건설을 주장하였지만 상대 쪽에서 아나키즘의 파괴를 먼저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저주받은 아나키즘이라 불렸다. (…) 아나키스트들은 현대의 표준화된 사회를 개인적인 상상력을 통해 이성과 본능에 바탕을 둔 자율적인 사회로 만들기를 원한다. 그 자율적인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려는 국가나 권력이 있는 한 아나키스트들의 투쟁은 영원할 것이며 아나키들의 연대는 국경을 넘어 계속될 것이다. 영어가 판치는 현실 속의 세상을 에스페란토로서 유토피아의 꿈의 연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나키스트이어야 가능하다. 아나키스트는 에스페란토를 하여야 하며 에스페란티스토는 아나키스트여야 하는 것이다. (앞의 책 18〜19쪽)
 
  21세기의 아나키즘

  국가의 이름으로 온갖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요즘 “국가가 야만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국가는 야만의 발생을 토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갈파한 폴 발레리는 설득력을 가진다. 아울러 발레리처럼 “아나키즘이란 자신의 이상이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나 규율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좀 폭넓게 해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디오게네스와 노자 같은 고대의 현자들과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같은 19세기의 아니키스트, 박열, 신채호, 이회영, 오스기 사카에, 예르셍코, 루쉰 등 20세기 아나키스트 계보에 21세기의 반항아들, 이를테면 존 레넌,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 노암 촘스키, 권정생 등의 이름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조르바와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아나키스트가 아닌가.
 
   


 글쓴이 / 정지창
· 전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연극평론가
· 민예총 이사장
· 저서 :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다산연구소 - 이달의 책] 2013-12-27  (다산연구소 = 평화뉴스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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