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달성공원 '번개시장'의 이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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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서 기른 열무, 200원 남긴다는 파 한단, 막걸리 한 잔의 일용직...8시 넘자 '떨이'


어둠이 가시지 않은 20일 새벽. 귀뚜라미 소리만 나즈막히 울려 퍼지는 달성공원 앞 도로에 장을 펴러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매일 새벽4시부터 8시 30분까지 이곳에는 '번개시장'이 열린다. 15년째 새벽을 열어오고 있는 장터 사람들을 만났다.

달성공원 번개시장. 새벽 4시를 조금 넘자 채소 장사를 준비하는 어느 70대 할머니(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달성공원 번개시장. 새벽 4시를 조금 넘자 채소 장사를 준비하는 어느 70대 할머니(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달성공원 번개시장은 중구 달성공원 정문에서부터 적십자혈액원까지 600m남짓한 도로 양쪽으로 1년 365일 열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장이 들어섰다 사라진다 해서 '반짝시장'으로도 불린다. 15년 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상인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형성된 시장은 현재 상인 250여명이 상인회를 만들어 운영할 만큼 대구 대표 '노점시장'으로 거듭났다. 채소, 과일, 생선 등 먹거리에서부터 시작해 식기, 의류, 공구 등 온갖 물건들을 살 수 있다.

번개시장은 주말의 경우 200여개의 노점이 열리고 평균 2천명의 손님이 시장을 찾아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평일에는 주말의 절반정도인 100여명의 상인이 장을 펴는데, 20일에는 비가 내려 상인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70여개의 노점만 열렸다. 새벽5시를 넘어서자 비가 더 거세게 내렸고, 상인들은 펼쳐놓은 물건이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이나 파라솔을 펼쳤다. 정작 본인은 온몸으로 비를 맞아가며 채소에 비닐을 덮는 상인들의 얼굴엔 땀과 비가 뒤섞여 흘러내렸다.

10여년간 번개시장에서 채소와 옻나무를 팔고 있는 제갈임태(64)씨는 직접 텃밭에서 기른 열무를 펼쳐놓고 라디오를 켰다. 평일인데다 비까지 내려 조용했던 거리에 활기가 돌았다. 제갈씨는 "꼭 장사를 해서 돈을 벌라고 나오는 게 아니라 시장 사람들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재미로 나온다"며 트로트가락에 몸을 실었다.

10년째 번개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제갈임태(64)씨 (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10년째 번개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제갈임태(64)씨 (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실제로 제갈씨의 평일 하루 수입은 1만5천원 남짓. 직접 기른 열무, 고구마, 옥수수 등을 1천원에서 많게는 3천원으로 팔지만 평일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기름 값을 쓰고 막걸리 한잔 하면 몇 천원 수입이 고작이다. 그나마 일요일에는 매상이 15만원까지 올라 한 달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했다. 제갈씨는 젊은 시절 철공으로 일하며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가창에서 홀로 살고 있다. 그에게 번개시장은 생계유지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닐까.

이 곳을 찾는 '주요 고객'은 달성공원에 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이다.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공원에서 산책을 한 뒤 시장을 둘러보면서 식재료나 필요한 물건들을 사간다. 시장 곳곳에 있는 '주막'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회포를 푼다. 국밥, 해장국, 오뎅 등을 안주삼아 한 잔에 1천원 하는 막걸리를 마신다.

아파트 건설일용직으로 매일 새벽 일하러 나서는 50대 최모(평리동)씨는 비가 내려 일을 못나가 이곳으로 왔다. 그는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아도 여기에 오면 동료들이 다 모여 있다"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번개시장은 단돈 몇 천원으로 술과 밥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며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국밥에 막걸리 한 잔을 나누는 사람들과 직접 만든 빵을 팔고 있는 30대 A씨(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국밥에 막걸리 한 잔을 나누는 사람들과 직접 만든 빵을 팔고 있는 30대 A씨(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시장의 중간지점, 30대 청년이 눈에 띄었다. '오빠야빵'이라는 종이간판을 내걸고 빵을 팔고 있는 30대 중반의 A씨는 5년째 매일 이곳에 나온다. A씨는 "번개시장에서 가장 젊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저녁6시부터 새벽2시까지 빵을 만들어 바로 가져와 판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 어려운 점도 있지만 내 장사를 하는 것에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A씨의 목표는 40살이 되는 해 조그마한 가게를 얻는 것이다. '사업자 등록'을 하는 그날을 위해 번개시장 한켠에 매일같이 매대를 펼친다.

번개시장 대부분의 상인들은 매천시장, 팔달시장 등 도매시장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해 싼 가격에 판매한다. 15년째 이곳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B할머니(72)는 20일 새벽 매천시장에서 한 단에 1800원을 주고 파 20단을 사왔다. 손님들에게는 200원을 더해 2천원에 판매한다. 할머니는 "다른 장에서는 2,500원에 팔지만 여기서는 최대한 싸게 팔아야 한다"며 "할매 할배들이 집에서 놀면 더 아프기 마련이다. 앓아눕지 않는 이상 매일 여기 이 자리에 나올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집에 가서 먹어라"며 배추 한 포기를 건네 주셨다. 배추 값이 '금값'이라는 요즘, 금보다 몇 배는 더 값진 마음이 전해졌다.

매천시장에서 사온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매천시장에서 사온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아침 8시가 지나자 노점정리로 거리가 분주해졌다. 과일박스를 정리중인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빨간 티셔츠 차림의 박용배(65)씨를 만났다. 박씨는 중구청 도시경관과 가로정비계 계약직으로 3년째 번개시장 노점상 지도를 하고 있다. 구청에서 지정한 번개시장의 영업시간인 평일 8시 30분, 일요일 10시를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 주 업무다. 박씨는 "상인들에게 번개시장은 생계터전이기 때문에 각자 스스로가 규칙을 잘 지키려고 하는 편"이라며 "가끔 영업시간을 안 지키는 경우도 있지만 9시 이전에는 대부분 정리가 된다"고 했다.

'떨이'를 외치는 상인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던 거리는, 9시 무렵이 되자 오고가는 차량들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내일도 번개시장 상인들의 하루는 조금 일찍 시작된다.

달성공원 번개시장. 비가 내리는 20일에도 새벽 4시부터 장이 서 아침 9시무렵 마무리됐다.(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달성공원 번개시장. 비가 내리는 20일에도 새벽 4시부터 장이 서 아침 9시무렵 마무리됐다.(2015.8.20)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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