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와 메텔이 있는 그 편의점 "잘 살기보다 행복했으면..."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8.01.3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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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한 편의점 사장님, 자비로 만화영화 주인공들 동상에 벽화·여성전용 흡연실도 설치
김진상(45)씨 "숨어서 담배 피는 여성들 배려하고, 일상에 지친 어른들이 잠시라도 동심 되찾길"


<은하철도 999> 철이와 메텔, <미래소년 코난> 코난과 포비 동상(2018.1.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은하철도 999> 철이와 메텔, <미래소년 코난> 코난과 포비 동상(2018.1.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70~80년대를 풍미한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1978년)> 히로인 메텔이 벤치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메텔의 기차 여행 동료인 철이가 망토를 두르고 한 손에 소총을 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섰다.

조금 더 걸어가면 동시대 소년소녀에게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1978년)> 주인공 코난이 주무기 작살을 들고 갓 잡은듯한 물고기를 밟고 서 있다. 맞은편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여전한 키낮은 나무 옆에 코난의 친구 포비가 새끼 돼지를 안고 함박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31일 대구시 수성구 수성동4가 한 아파트단지 편의점 앞 인도 풍경이다. 그때 그 시절 만화영화 주인공들이 동상으로 태어났다. 메텔 옆에는 '세월은 되돌릴 수 없지만 잃어버린 동심은 잠시나마 되돌릴 수 있기를 바라며'라는 글귀가 붙었다. 포비 아래에도 '과자 한 봉지로 행복했던 어린시절 크게 바라는 게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잘 살기 보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혔다. 

동상 옆에 새겨진 문구들(2018.1.31)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동상 옆에 새겨진 문구들(2018.1.31)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동상 4점이 늘어선 상가 안쪽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진풍경이 펼쳐졌다. 벽면을 수놓은 애니메이션 <꼬마자동차 붕붕(1985년)>, <마녀 배달부 키키(1989년)>, <이상한 나라의 폴(1976년)> 주인공들이 노란색 자동차를 타고, 빗자루를 타고, 애완견 삐삐를 타고 벽 위를 날아다녔다. 

누가 만든 것인지 또 누구에게 전하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거리를 지나거나 상가를 찾은 이들의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이 머물렀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아이, 어른할 것 없이 폰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바쁘다. 엄마의 손을 잡고 온 한 아이는 이름을 모르는 캐릭터 앞에서 연신 방긋 거린다.

점심 시간 커피를 마시러 편의점을 들른 직장인들의 눈길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혹시 너무 힘이 들면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천천히 함께 갈 수 있다면 이미 충분하니까' 가수 서영은씨의 노래 <꿈을 꾼다>의 가사다. 근처에서 일하는 한 은행 노동자는 "좋아하는 노랜데 괜히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상가 벽화에 그려진 애니메이션 주인공들(2018.1.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상가 벽화에 그려진 애니메이션 주인공들(2018.1.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진상씨가 설치한 여성전용 흡연부스(2018.1.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진상씨가 설치한 여성전용 흡연부스(2018.1.3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아파트 단지 한 켠을 수놓은 작은 만화영화 동산. 이곳을 만든 이는 편의점 사장님 김진상(45)씨다. 그는 2년여간 자비를 들여 아파트 한 칸을 정성스레 꾸몄다. "일상에 지친 어른들이 잠시나마 이 곳에서 동심을 되찾고 예전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공간"이라고 그는 밝혔다.

김진상(47)씨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진상(47)씨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독특한 풍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김씨는 여성전용 흡연공간도 편의점 앞에 따로 만들었다. 벤치 두 개에 방석을 놓고 불투명 창에 차양막을 설치했다. 한켠에는 전기난로가 공간을 훈훈하게 덥혔다. 남성들은 가게 앞, 거리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워도, 여성들은 골목길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 전용 공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여성들을 보고 배려하자는 마음에서 부스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저 한 잔의 커피와 담배 한 대를 피우는게 어른들의 하루 중 유일한 휴식 시간인데 좀 더 그 공간을 배려하고 편안하게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라며 "칭찬을 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고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냥 부끄럽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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