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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 값을 치르고 있는가?
윤두열 /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박선영 지음 | 스윙밴드 펴냄 | 2017)
2018년 07월 09일 (월) 10:32:01 평화뉴스 pnnews@pn.or.kr

그래, 그때부터였다. 또래보다 어른 손 한 뼘은 작고 여리여리했던 나는 10살이 되어도 미취학아동이었다. 버스는 공짜로 탔고 목욕탕은 1000원을 덜 내었다. 중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였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이제는 나의 잔머리라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초등학생 1명이요”를 자연스레 외쳤다. 그렇게 해서 아낀 돈은 오락실에서의 스트리트파이터 한 판이 되었다. 머리가 더 굵어지고선 버스 회수권을 11장으로 잘랐다. 대학생이 되어 배낭여행을 가선 2명이 잔다고 예약하곤 4명이 한 방에서 묶었다. 따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이를 요샛말로 ‘꿀팁’이라며 친구들에게 알리고 PC통신 동호회에 자랑스레 경험담을 적곤 했다.

"속이고 이용해먹는 사람이 다수일 때 정직하게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호구가 된다"(『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 중에서)

요즘에도 이런 ‘꿀팁’은 넘쳐난다. 물론 내가 어른이 되고나서 본 ‘꿀팁’의 판은 그 크기가 달라졌다. 국.공립어린이집에 보내려고 맞벌이부부점수 때문에 위장취업을 하거나 혹은 위장전입을 들키지 않고 하는 방법이 육아카페에 버젓이 돌아다닌다. 외제차를 몰고 다니면서 수급권자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을 보는 건 이제 예삿일이다. 제보와 불법을 비웃는 ‘꼼수’들이 ‘꿀팁’이라는 이름으로 난립한다. 세상은 호구로 살지 말라고 외치는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손해보고 그 방법의 ‘정직’을 따지기보다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을 먼저 따지게 된다. 자연스레 세상을 정직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간다.

나도 어른이 되었지만 생각은 회수권을 자르던 나이에 머물렀다. 2014년 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베이커리회사의 어플에서 2만원짜리 케이크를 2천원에 판다는 카톡이 울렸다.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고민 없이 10개를 샀다. 나도 먹고 지인들에게도 생색을 내며 나눠줄 요량이었다. 누가 봐도 담당자의 실수가 분명한 것이었다. 난 혼자 1/4 조각도 다 먹지 못하는 케이크를 10개나 사버렸다.

   
 

"세월호는 이 국가에 산적한 과제 중 가장 쉬운 과제이다...세월호는 결단만 하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문제이다. 간결하고 명쾌하기 때문이다...그 까닭을 밝혀내 다시는 그런 참혹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공방 가능한 논제인가"(『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 중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2014년 4월 16일이 왔다. 아내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원망이었다. 왜 구하지 못했을까? 왜 손을 놓고 있었을까? 분통을 터트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다 화살은 우리에게 돌아왔다. 아내가 그래서 내일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를 물었기 때문이다. 살아가기에 두려운 나라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날이 밝을 즈음에야 서로 약속했다. 작은 것도 속이지 말자고.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앞으론 그렇게 살아가자고.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날 아침 슬그머니 그 어플에서 예약한 케이크를 환불했다. 그 날 이후 난 ‘제 값을 치를 줄 아는 어른’으로 한 뼘 성장했다.

"대한민국은 징글징글한  메리토크라시의 추종자들이 사는 나라다. 그런데 직업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기까지의 투입만 능력이고, 직업 수행의 과정에서 투입되는 노고는 능력이 아니다...그들은 높은 경쟁률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 땅에서 능력이란 무엇인가"(『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 중에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지만 청소노동자보다 교수들의 월급이 더 많다는 사실은 지나가는 아이들의 고개도 끄덕이게 하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종종 욕설이나 성희롱이 날아오는 전화기를 하루 종일 붙들고 응대하는 누나. ‘밥 짓는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으며 300인분의 밥을 3시간 안에 짓는 어머니. 컵라면이 든 가방을 던져두고 빠르고 능숙하게 스크린도어를 고치는 동생. 그들에게 주어지는 월급은 지난해 우리나라 직장인 평균월급 335만원보다 많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능력에 제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

내 아이는 날 닮아 작고 여리여리하다. 초등학교 2학년인데 어딜 가면 학교는 들어갔어요?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초등학생 요금이 없어진 것이 아쉽지만 어쩌랴? 나와 같은 요금을 내며 목욕을 한다. 제 값을 치르는 세상에 2000원 만큼 보탬이 될까 해서다.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다.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눈 앞에 '꼼수'를 '꿀팁'이라고 포장하며 제 값 치르기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꽃 피는 봄날 꺄르르 웃으며 배에 오른 아이들 300명을
바다에 묻어버린 그 누군가는 지금 제 값을 치르고 있는가?

벌써 35도를 오가는 날씨에 공간의 쾌적함을 선물하는 청소노동자에게, 에어컨수리노동자에게 우리는 제 값을 치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오늘
제 값을 치르는 하루를 살았는가?

사족. 문재인 대통령처럼 가장 먼저 집어 드는 신문은 아니어도 한국일보를 즐겨본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 이 책의 저자 박선영 선배의 생각과 그 생각을 풀어낸 글을 읽을 수 있어서다.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기획을 하다, 기사를 쓰다, 혹은 그저 망상을 하다 생각이 막힐 때는 박 선배의 글을 찾곤 했다. 이제는 한국일보에서 더 이상 박선배의 글을 읽을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지난해 출간한 이 책이 있다. 지난 5년 동안의 칼럼을 모은 책이지만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사는 한 이 글은 유효하다.


   
 






[책 속의 길] 139
윤두열 / JT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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