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처받은 이들을 감싸안지 않는가”

평화뉴스
  • 입력 2005.02.1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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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수사기관”...“피해자 여성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현실”


한 여자가 울고 있다.
몸 떨림으로만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왜 우냐고 물으니 그제서야 통곡을 한다.

성폭력. ‘아픔’으로, ‘상처’로 그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표현으로도 피해자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친구. 여고 2학년이던 때에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자 남자는 우산을 핑계로 자기 집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친구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방으로 들어간 그 남자가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했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든 친구는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온 그 남자는 갑자기 화를 내며 들어가자고 했다. 친구가 “나, 그냥 갈래.”하며 돌아서는 순간 그 남자의 주먹이 친구의 배를 힘껏 쳤다. 친구는 배를 움켜쥐고 후들거리는 다리,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돌아섰다. 친구는 그날 자기가 방으로 들어갔으면 일어났을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단다.

성폭력을 당할 뻔한 것만으로도 평생 고통을 받는데,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며 떳떳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 정말이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니 떳떳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러나 이유 없이 욕 한 마디 들어도 기분 더럽고, 맘 상하고, 가슴에 상처 남는데,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을 당했는데, 그놈이 나쁜 놈이지, 난 잘못이 없어, 그렇게 지나칠 수 있을까.

성폭력의 직접적인 가해자 못지않은 2차적 성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충분히 반항하였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강간죄의 성부를 판단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강간피해가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자신을 비하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이나 법정증언을 당당하게 하지 못하거나 고소 자체를 후회하게 된다.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고소를 한 후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내가 판단하기에 명백히 강간이 성립하는 경우였다. 며칠 후 가해자들의 부모가 찾아왔다. 피해자들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 가관이다. “재미 볼 것 다 보고... 부산까지 따라간 게 잘못이지...” 자기 자식들 잘못은 안중에도 없고 피해자들 탓하느라 정신이 없다.

경찰관의 피해자 조사시 동행했다.
조사관은 피해자들의 진술을 받을 때 강간이 존재하였는가, 즉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질문, 예컨대 ‘늦은 시간에 부산까지 간 이유는?... 소리를 지르지 않은 이유는?... 곧바로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등의 질문을 하였다. 아직도 이런 식으로 조사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2-3번씩 그와 같은 질문을 받은 피해자들은 우리가 피의자냐, 앵무새냐고 눈물을 흘렸다. 경찰 조사만 2-3번이다. 진술이 일관됨에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한다.

경찰관의 피해자 조사시 드러난 문제점과 피해자들의 진술이 일관되는 점을 들어 피해자들 조사를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이 덜 상처받게 해달라는 취지의 서면을 검찰에 제출했건만 검찰에서도 두 번씩이나 피해자들을 불러서 또다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여 피해자들을 울렸다. 그런 후에 검찰에서 피해자들에게 한 말은 반항을 충분히 하지 않아서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강간죄의 성부를 판단하는 데에 굳이 고려하지 않아도 될 것을 이유로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니... 지극히 남성중심의 편견에 사로잡혀 강간죄 성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이미 기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검찰의 인식이 이러할진대, 설사 가해자들이 기소가 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은 또다시 법정증인으로 소환될 것이고, 가해자들의 변호인은 피해자들의 품행, 성경험 등을 이유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고 피해자들이 강간을 유발했다고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들 것이다.

결국 피해자들은 고소 후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강간 그 자체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고통만도 평생 치유하지 못할진대 2차적 강간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마저 더해지니 얼마나 힘들 것인지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미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돌변해 있는 가해자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했다가는 맞아 죽거나 목 졸려 죽거나 할 것 같은 두려움에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 입장은 왜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건지.

‘모리슨 토리’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피해자인 여성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반면, 가해자인 남성 피고인은 마치 자신의 명예가 훼손된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또 어떤가.
성폭력의 피해자를 더럽혀진 자, 강간을 유발 또는 유혹한 자로 취급하여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피해자들에게는 죄가 없다. 강간신화, 즉 ‘여성이 진정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강간을 막을 수 있다, 극단의 강제력이 사용되지 않는 한 동의 없는 성교는 단지 성교행위일 뿐이다, 고상한 여성은 강간당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은 남성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일 뿐, 피해자들에게는 죄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식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는 것이지, 전혀 잘못이 없는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사기관 등의 노력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인식전환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권미혜(변호사)

* 1966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권미혜 변호사는, 영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10년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서른살에 법대에 진학해 올해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현재 <종합법률사무소 다물>에서 일하고 있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원으로, <대구시 성매매방지대책협의회> 위원과 <우리복지시민연합> 운영위원, <대구 가정법률상담소>와 <대구 여성의 전화> 상담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5년 2월 9일 <평화뉴스>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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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마다 실리는 [시민사회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005.2.9(수) 권미혜(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원)
2005.2.16(수) 조근래(구미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 사무국장)
2005.2.25(수) 김두현(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국장)
2005.3.2(수) 권혁장(참언론대구시민연대 활동위원, 대구참여연대 시정개혁센터 실행위원)
2005.3.9(수) 김동렬(대구KYC(한국청년연합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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