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士禍)로 죽어간 억울한 사람들

다산연구소
  • 입력 2019.06.0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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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연구소] 박석무 / "빨갱이라고 억울한 누명 쓴 사람들...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고 믿으며"


  역사적 기록들을 읽어가다 보면 아무런 죄 없이 반대편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죽어간 억울한 죽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선조 8년(1575)에 서인과 동인으로 분당이 되면서 자신의 당이 권력을 잡고 또 그 권력의 영속화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건이 많았는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당파라는 붕당의 싸움 이전에도 조선에는 매우 많은 사화, 선비들이 당하던 화란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조광조 같은 대학자가 억울하게 죽어간 기묘사화를 비롯하여 무오사화·을사사화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화 때문에 우수한 학자나 인재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갔던가요.

  동서분당 이후로는 더 큰 참화가 이어져 정여립 사건으로 죽어간 그 많은 선비들, 허견 등의 사건으로 일어난 경신대출척에 죽어간 그 수많은 고관대작들이나 큰 선비들, 모함에 걸리고 가짜 뉴스에 얽혀서 생죽음을 당했던 그런 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만 했습니다. 다산의 기록인 「복암이기양묘지명(茯菴李基讓墓誌銘)」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그런 화란이나 사화를 당해 죽어간 억울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섭다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른바 남인4인, 정조 시대에 거대한 노론에 맞서 자신들의 능력과 인품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그래도 조금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정조의 치세를 돕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채제공, 이가환, 이기양, 정약용이 그들인데 신유옥사라는 사화에서 가장 억울하게 당했던 이들이 이가환과 이기양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양의 서적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으나 천주학쟁이로 몰려 함경도 국경 끝자락으로 귀양 가서 죽고 말았던 이기양의 이야기는 참으로 비참한 내용입니다. 한음 이덕형이라는 어진 선조의 후손으로 먼 시골의 조그마한 고을의 수령을 지내다가 정조의 인재발탁에 포함되어 곧바로 문과에 급제하고 급기야 예조참판이라는 고관에 오른 유능한 학자관인이었는데 다만 이가환·정약용 등과 가깝게 지낸 남인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천주학의 천(天) 자도 모르는 사람을 천주학쟁이로 몰아 극지로 귀양 보내 죽게 했던 사건이 바로 ‘신유사화(辛酉士禍)’라고 다산은 표현했습니다.

4·3희생자들... /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4·3희생자들... / 사진 출처. 제주4·3평화재단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처녀로 60이 넘은 영조의 계비(繼妃)로 궁중으로 들어온 정순대비는 어린 증손자를 수렴청정하면서 정권을 잡자, 노론 벽파를 위해 남인 시파들을 완전히 탄압했습니다. 그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유옥사 9년 뒤인 기사(1809)년 이기양은 죄 없이 죽었다는 판단이 나와 옛날의 벼슬을 되찾고 복권이 되어 죄 없이 죽었다는 억울함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런 것입니다. 다산도 이기양과 똑같이 억울한 귀양살이를 했기 때문에 1910년 나라가 망하기 직전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렸고, 규장각 제학이라는 벼슬을 증직받아 죄 없던 사람으로 사면되었습니다.

  빨갱이가 아닌데도 빨갱이라고 오해받는 억울한 사람들, ‘좌파독재’라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사람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고 믿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감추고 숨겨도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글쓴이 :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다산연구소 -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2019-6-3 (다산연구소 = 평화뉴스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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