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를 만드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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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칼럼] 개인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최근 우리나라를 휩쓴 ‘조국 태풍’ 와중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였다. ‘위선자’는 상대방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을 때, 서로의 관계가 끝장나도 상관없다고 할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표현이 난무하는 극한 대립의 시국이 걱정스러워서 위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소극적 위선자도 있다

보통, ‘위선자’는 겉으로는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적극적이지 않은 위선자도 있다. 필자가 한번은 부동산 투기에 관한 대중 강연에서 이런 예를 든 적이 있다. “제가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가격이 늘 고만고만했는데 도시철도 3호선이 개설되면서 값이 올랐습니다. 이런 불로소득을 개인이 차지하도록 방치하는 제도가 좋을까요? 아니면 이를 다른 세금보다 우선해서 징수하는 제도가 좋을까요?” 그랬더니 어떤 분이 질문하였다. “교수님은 그 오른 집값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려운 문제다. 필자는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했지 그런 제도 속에 사는 사람을 문제 삼은 게 아니지만, 그래도 질문자로서는 필자가 자신의 불로소득을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면 위선자가 아니냐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사진 출처. <부동산공화국 경제사>(저자 전강수, 출판사 여문책, 2019년 1월 출간 ) 책 표지 하단
사진 출처. <부동산공화국 경제사>(저자 전강수, 출판사 여문책, 2019년 1월 출간 ) 책 표지 하단

또 필자는 지난 달 칼럼에서 학벌특권을 예로 들면서 특권적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생들이 ‘학벌특권을 활용하여 좋은 직장의 정규직이 되고 건물주도 되고 싶다. 또 이런 특권을 자녀에게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73.9%에 달하는 [조국] 반대율은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자신이 비판하는 현상에 스스로 동화되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이든 누구든 진정 정의를 원한다면 이미 획득한, 그리고 앞으로 획득하려고 하는 특권부터 다시 돌아보기 바란다.” (2019/9/30 <평화뉴스> '조국 태풍', 특권적 제도를 날려버리길)

이 글을 본 한 친구가 이런 취지의 댓글을 달았다. ‘서울대를 나와 학벌특권을 누린 김 교수가 이렇게 말하면 후배들이 승복하겠나?’ 필자가 학벌을 내세운 일이 없다고 해도 학벌특권이 작용하는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덕을 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 이 말도 일리가 있다.

자기 반성형 '위선자'도 있다

자기 반성이 투철한 양심가 중에는 백이숙제처럼 살지 않은 자신도 ‘위선자’라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지인이 최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자.

[스스로] 돌이켜 생각하면..... 시민 사회 운동에서 말만 앞섰지 솔직히 실천은 뒷자리였습니다. 문민정부 시절 진보 권력자들이 룸살롱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부류였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윤리적으로 안과 밖이 다른 제 삶은 위선적이었습니다. 이번 ‘조국 사태’는 제가 가슴 속 깊이 자리를 튼 위선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계기였습니다.

사회제도는 사회 구성원의 행동에 관한 공통의 틀 또는 규칙이다. 법령에 의해 인정된 공식 제도도 있고 관습이나 관행에 의해 형성된 비공식 제도도 있다. 사회제도는 사회 구성원에 대해 구속력을 가진다. 사회제도에 따르지 않는 개인은 작게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심하면 그 사회에서 배제될 수 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은 제도에 적응해서 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제도가 잘못 되어 있으면 이런 평범한 사람까지도 모두 ‘위선자’가 될 수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부터 도입해야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다. 달리는 기차에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면 열차 진행 방향에 동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은 사람을 모두 위선자라고 해야 할까? 별 생각 없이 제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온 사람, 혹은 잘못된 제도인 줄 알아도 소극적으로 순응해서 살아온 사람까지 위선자로 몰아야 할까? 또 자신을 성찰하면서 괴로워하는 자칭 ‘위선자’를 방관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면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기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를 개인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하도록, 최소한 모순되지는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교통 신호를 잘 운영하면 개인도 사회도 덕을 본다. 학벌특권이 없다면 조국 교수 자녀든 다른 학생이든 스펙을 쌓느라고 젊음을 낭비하는 대신 각자 보람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제도 순응자는 위선자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도움을 주는 애국자가 된다.

제도, 특히 공식제도는 주로 정치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사회적 강자를 더 많이 대표해온 현재의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최소한, 국민의 정당 지지율에 비례하여 국회 의석수를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부족하나마 현재 국회 패스트트랙에 올라있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도 성사시켜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서 이에 반대한다면 크나큰 위선이다. 그런데도 조국 교수에게 ‘위선자’라고 공격을 퍼부은 진영에서 이 안건에 반대하고 있다. 헛웃음이 나온다.






[김윤상 칼럼 85]
김윤상 / 자유업 학자, 경북대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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