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하는 사람의 겸손함이 필요하다”

평화뉴스
  • 입력 2005.03.23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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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있거라”
"비장하고 살벌한 집회문화, 다가가기 힘든 벽..시민을 대상화하진 않는가?"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공통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대학문화는 가난을 딛고일어선 고시생의 합격플랙카드로 대변되는 ‘상아탑’이미지는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선전물, 집회와 시위, 분신으로 대변되는 군사정부에 대한 항거.

또한 우리나라 사회구성체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 그리고 학생회 선거와 야외투쟁을 위한 조직의 전략과 전술. 그 외에도 거리의 짱돌과 화염병, 신나, 민중가요, 개량한복, 파업, 혈서, 삭발, 전경, 최루탄, 고문, 쇠파이프 등등의 단어들을 통해 8090의 대학문화는 군사정권과 독점자본에 대항해 싸우던 또 하나의 민간군사문화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우연히 대학에서 총학생회 활동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대경총련 투쟁국장이라고 했다. 헉! 투쟁국장. 아직도 투쟁국장이라는 말을 쓰냐고 했더니 머썩하게 웃었다. 갑자기 ‘기체후 일향만강하시옵니까?’라는 인사말이 떠올랐다. 시대는 빨리 변하기도 하지만 생성된 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

몇년전 치열한 80년대를 살았던 한선배의 고백이 기억났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화장실에 앉았더니 피식 웃음이 나더라. 대학운동권에서 쓰는 용어들이 너무 길어서 축약해서 쓰던 붐이 있었는데 변유론(변증법적 유물론), 사유론(사적유물론), 사구체(사회구성체), 사투(사상투쟁),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 우리가 사랑했던 무수히 많은 단어들은 지금은 온데 간데 없더라. 그래서 생각한건데 말은 줄이면 안될 것 같애. 그리고 긴말도 필요없다고 생각해’

몇일 전에 반전평화관련 회의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올해 3.20관련 행사내용을 한 대선배가 보시더니 ‘약한게 아니냐, 이래가지고 느낌이 오겠냐? 이번에는 태우는 것 없나’ 그때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듯한 역겨움이 있었다. 아직도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 태우고, 부수고, 거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길 바라는가? 이제 대구백화점 앞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지나가는 시민들이 아닌 한줌도 안되는 집회개최자들이 소외받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대백에서 줄곧 반미, 평화, 노동해방, 민중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함께 섞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든다. 결국 주장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군사문화에 대항하던 방식에서 피어난 대학문화가 이제 지난 시절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를 한다. 하지만 80년대의 시대적상황이나 80년대 선배들로부터의 문화적 세례를 받은 대다수 시민사회활동가 및 실무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의 집회, 캠페인, 시위, 문화행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임금협상 시절이 돌아오면 1987년인지 2004년인지 구별이 안되는 노동단체의 집회스타일. 높은무대와 붉은깃발, 선언으로 가득찬 현수막, 머리에 붉은띠를 두르고 정치연설을 듣고 있는 참가자의 모습에서 ‘무엇을 주장하는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주장하는가?’고민은 없다는 느낌은 비단 나만의 느낌일까? 이런 ‘비장하고 살벌한 집회문화’에 대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다들 느끼지만 집회를 조직하는 중심실무자들은 늘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시위에서 공연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역할은 ‘문화선전단’, 혹은‘나팔수’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YMCA, 경실련, 환경련, 참여연대 등과 같은 시민사회단체의 출연으로 집회와 시위방식이 많이 변했다. 전문가의 식견이 뒷받침되는 시민들의 건강한 상식을 표현하는 캠페인이 집회와 시위를 대체했다. 길고 재미없던 ‘정치연설’이나 ‘정세분석’은 사라지고 시민들이 마이크를 잡는 자기생각을 이야기하는 웃기고 재미있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집회를 개최한 집단의 무거움이 시민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강요되는 분위기가 걷힌 것이다.

1인시위도 이렇게 생겨났다. 그러나 대규모동원집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론플레이라는 다소 정치적인 방식으로 사진 한 컷, 방송 몇 장면 등으로 시민들을 만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설득적으로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퍼포먼스와 문화행사방식으로 진행하면서 캠페인방식을 다양하게 전개해 나갔다. 또한 상징조형물을 통해 메시지를 보다 쉽고 간단하게 시각화시키는 시도들도 많았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집회와 시위는 더욱더 다양해졌다.

요즘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시위는 기본이고 플레쉬몹이나 퍼포먼스같이 행위중심으로 진행하는 시위가 많아졌다. 문화행사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즐겁고 재미난 방식도 늘어났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토론하고 활동하는 현대인들의 생활을 이용해 플래시크라우드(flashcrowd·갑자기 접속자가 폭증하는 현상)와 스마트몹(smartmob·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집단)의 개념을 합성해 등장한 플레쉬몹은 작년부터 한국에 상륙해 집회와 시위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전반적인 집회경향은 조직적 참가와 참여의 지속성이 하락하는 추세지만 2002년 여중생사망사건, 대통령탄핵, 이라크파병 등과 같은 전국적 사안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대규모 연대감은 과히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물론 2002월드컵시즌 붉은악마를 중심으로 진행된 대규모축구응원에 대한 기억들은 87년 ‘6월항쟁’과 같은 대규모집회의 지속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대규모 광장집회나 거리시위와는 다른 방식으로 1인시위, 사이버시위, 이슈퍼레이드도 다채로와졌다. 전국도심을 대상으로 유랑, 순례, 답사하는 벌이는 시위도 많아졌다. 이라크파병에 반대하기 위해 문정현신부를 중심으로 구성된 평화유랑단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세계최대의 동성애자축제인 호주 마디그라(Mardi Gras)는 대표적인 이슈퍼레이드형 시위다.
첫 시작은 ‘부끄러움을 벗고 과감히 보여주자’라는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와서 즐기고 다양한 성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대규모 문화시위가 되었다. 올해로 5회째로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진 퀴어문화제도 이슈퍼레이드가 아닌 집회나 시위같은 딱딱한 방식으로 시작했다면 누구나 와서 즐기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재미난 집회, 즐기는 시위는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지만 지역의 집회와 시위를 보면 다가갈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것이다. 특히 노동자, 농민, 통일관련 집회는 80년대 집회방식과 별반 다를 게 없어보인다. 80년대의 정체성으로 형성된 노동자, 농민, 통일단체들이 지금 시대에 걸맞는 문화적마인드를 가지기를 기대해보며 자기집단의 강경함과 팍팍함보다 스스로의 즐거움, 재미, 여유를 보여줄 수 있는 의사표현을 기대해본다. 집회와 시위의 미래양식을 어느 시민단체 선배의 말에서 마지막으로 찾아보고 싶다.

“시위의 마지막은 ‘주장하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스님들을 봐라. 그들은 온몸으로 시위한다. 히피와 같다. 정신이 몸에 깃들어 스타일과 패션으로 보여준다. 자기집단만의 절실함을 무기로 시민을 대상화시킨다면 대구백화점 분수대에서 메가폰들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 외치는 광신도와 뭐가 다르겠느냐?”

권상구(거리문화시민연대 사무국장)
* 권상구 사무국장은, [경북대영자신문사] 편집국장과 [대구YMCA] 이사, [대구거리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대구관광정보센터] 자문위원과 [거리문화시민연대]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시민참여형 문화예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5년 3월 16일(수) <평화뉴스> 메인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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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시민사회 칼럼]을 싣고 있습니다.
제 3기 [시민사회 칼럼]은 2005년 3월부터 6월 중순까지 모두 16차례 연재됩니다.
함께 고민하고 나눠야 할 가치를 위한 [시민사회 칼럼]에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3.2(수) 권혁장(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사무처장)
3.9(수) 윤삼호(대구DPI(대구장애인연맹) 정책부장)
3.16(수) 권상구(거리문화시민연대 사무국장)
3.23(수) 오택진(대구경북통일연대 사무처장)
3.30(수) 권혁장(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사무처장)
4.6(수) 윤삼호(대구DPI(대구장애인연맹) 정책부장)
4.13(수) 권상구(거리문화시민연대 사무국장)
4.20(수) 오택진(대구경북통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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