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

평화뉴스
  • 입력 2005.04.0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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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의 목요칼럼 4>...
“자아도취를 수반한 권력에는 강력한 견제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즐거움을 얻는 방식은 두 가지 극단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남을 억누르는 가운데 이익을 보고 자신의 힘을 느낌으로써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의 기본 메커니즘은 고독한 자아도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에는 당연히 남들을 대등한 주체 혹은 대화상대로 존중하기 어려우며, 그들을 가치나 도덕의 차원에서 부정해야 하고, 심한 경우에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말살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바람직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이 일방적 권력행사의 즐거움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크고 작은 투쟁만 아니라 단순한 게임에서나마 상대를 쓰러뜨리고 승리했을 때의 짜릿함을 한두 번이라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폭력과 살인, 전쟁과 파괴를 소재로 하는 영화들도 끝없이 만들어져왔고, 이를 즐기는 관객들 역시 늘 줄을 서고 있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 맛을 즐기는 소양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내재해 있으리라고 본다.

이 맛을 언제라도 누릴 수 있는 권력자가 스스로 그 달콤하고 짜릿한 권력행사를 억제하기는 쉽지 않다. 자아도취 상태를 스스로 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아도취 증상의 한 가지 특징은 자신의 도취상태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그 상태를 끝없이 유지하려 합리화한다는 점 아닌가. 그래서 자아도취를 수반하는 권력에는 언제나 외부의 강력한 견제가 필요하다. 이 견제를 당연시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한 가지 원리다.

다른 극단은 유형무형의 재화와 권력,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데에서 얻는 즐거움이다. 이 역시 짜릿하다는 점에서는 일방적 지배에서 얻는 즐거움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약자에 대한 배려, 이웃사랑과 어진 마음을 설파해온 여러 종교나 가르침의 긍정적 핵심을 이 즐거움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에서는 상대와의 상호인정이 이루어지고, 막혔던 소통 길이 열리는 일종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즐거움의 정체를 알아보기 쉽게 규정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아마 권력 나누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니체 같은 사람이라면 뭐라도 악담을 퍼부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말투를 빌어 나약한 가축들이 패거리를 키워가며 즐거워하는 병리현상이라고 뒤틀린 소리를 하더라도 기적 같은 나눔의 즐거움이 시원하게 분석된 것 같지는 않다. 그 긍정적 에너지가 별로 해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분석하기 어려운 상대를 만날 때면, 나는 그것이 삶의 목적 내지 가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속단하고 싶어진다. 지금도 더 이상의 증명 없이 그냥 단언하고 싶다. 재화와 권력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각자를 사회생활의 주체로 세우는 짜릿한 즐거움은 그 자체가 이미 추구할 만한 목적이자 가치인 것이다. 자아도취적 권력에 대한 견제가 민주주의의 소극적 원리라면, 나눔에서 얻는 즐거운 에너지는 민주주의의 적극적 원리다.

물론 권력과 재화를 평화로이 나눌 때에도 얕은 계산과 매수와 아첨과 노예근성이 끼여들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부당한 지배권력에 맞선 투쟁은 이른바 천부인권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디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서 선후도 깊이 살피지 않고 양비론을 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 표면상 평화로운 질서 속의 가혹한 억압을 꿰뚫어보는 것은 지혜의 첫걸음이다.

최근 대구대 총장께서는 스스로 자초한 문제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계시다. 문제의 핵심은 별다른 분석이 필요 없을 만큼 간단하다. 자아도취적 권력 행사를 견제할 제반 장치들, 예컨대 교수협의회, 직원노조, 학생회 등의 민주적 역할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한동안 권력의 짜릿함을 누리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업무상 매일 총장과 직접 부딪쳐야 하는 직원선생님들의 인격과 주체성이 심히 부당하게 모독당했다. 모독의 사례들은 ꡔ평화뉴스ꡕ의 타이틀처럼 눈물의 산을 이룬다. 그에 맞선 저항은 천부인권이다.

같은 대학 구성원으로서, 특히 총장선출의 주체였던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총장의 독주를 막지 못한 데에 책임을 절감한다. 그저 개개인의 능력을 넘어선 난제였다고 자위할 뿐이다. 측근들의 조언조차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정이 그러하니 터질 것이 터졌다고 냉정히 보고 싶다. 그래도 대구대의 민주적 역량은 현재의 위기를 충분히 호기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전환의 출발점은 대학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언행에 대한 엄중한 책임추궁과, 독점적 권력에 대한 견제기능들의 온전한 회복이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소극적 원리를 구현하는 것일 뿐이다. 좀더 강력한 전환의 에너지는 대학구성원들 각자에 대한 상호인정을 바탕으로 역할 내지 권력을 나누고 서로를 대학발전의 주체로 세우는 데에서 나올 것이다. 나눔이라는 긍정적 원리가 충분히 구현된다면, 대구대의 민주주의 수준은 다시 한 단계 올라설 것이다. 이제 대구대는 그 필연적 행로에 들어섰다. 이번 과정은 지난날처럼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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