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4월 진달래”

평화뉴스
  • 입력 2005.04.0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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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칼럼 17>..."인혁당 30주기"
“피를 강물처럼 흘려도 진실의 불은 꺼트릴 수 없다”


오늘은 4월 9일이다. 4·9제 30주기를 추모하는 날이다. 며칠 전(4월 6일)부터 대구 시내 곳곳에서 '4·9 통일열사' 들에 대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고, 서울에서도 명동성당에서 8일날 추모행사와 이 분들이 처형당했던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을 찾아가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대구지역에서는 지난 89년부터 진보적인 통일운동 단체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 분들에 대한 공식적인 추모행사가 열려, 초기에는 행사 책임자가 구속되는 등 여러 가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언론들도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 대해 비교적 폭 넓게 보도하고 있다. 내가 진행을 맡고 있는 대구CBS 시사프로에서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관계자와 몇 차례 인터뷰를 방송하기도 했고, 평화뉴스와 영남일보, 한겨레를 비롯한 인터넷과 종이신문들도 지면을 할애했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여왔던 보수적인 매일신문이 이례적으로 넓은(?) 지면을 할애한 게 이색적이다.

이런 형편 때문인지 아직까지 대구지역에서는 4·9제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게 30년 전이지만 올해처럼 대대적으로 알려지고 추모하는 분위기는 처음인 것 같다. 세월이 정말 바뀐 탓인지, 아니면 30주기라는 숫자에 사람들이 목을 매는 것인지, 어쨌거나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한 일이다. 이를 계기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정신적 물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나는 명색이 시인이다 보니 지역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행사와 관련해서 기념시를 자주 쓴다. 어떤 때는 흔쾌한 기분으로 쓰지만 어떤 때는 힘들 때도 있다. 이번에도 4·9제를 추모하는 시를 부탁 받았다. 결국 쓰긴 했지만 지금까지 쓴 시 가운데 가장 힘들게 썼다. 고인들이나 관계자들에게 누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졸작으로 끝난 것 같다.

왜 이렇게 시 쓰기가 힘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사건과 나는 직접적으로 얽힌 게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해 안타깝고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다지 큰 실감으로 와 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구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동안 군사정권의 엄혹한 세월이 이 사건과 관련한 진실이 밖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차단해 왔고, 나 역시 이런 지역적 정서나 국민적 정서에 관련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체험이 바탕이 되는 것인데, 그런 절실한 체험이 없었으니 시 쓰기가 힘들 수밖에. 그렇다고 쉽게 쓰기에는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나 상처가 너무 큰 것이었다.

부활하는 4월 진달래
-인혁당 30주기 추모 기념시


4월 9일 남 먼저 서둘러 핀 진달래 몇 송이
꽃샘바람에 휩쓸려 떨어졌다
꽃 진 그 자리에 깊은 어둠이 가슴을 웅크린 채
웅덩이처럼 남아있다 잎도 피우지 않고
맨 몸으로 순결하게 피어났다 진 꽃이여
나는 남몰래 마음속으로 너의 이름을 불러 매운 채찍으로 삼는다

내가 세상에 나서 읽은 가장 슬픈 책,

“당시 겨우 걷기나 하던 3살짜리 막내아들, 동네 아이들이‘너희 아빠는 간첩이다’며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면서 때리고, 동네 나무에 묶어놓고 총살시키는 놀이를 했다.
초등생학생 딸아이가 소풍 갔을 때는, 아이들이 몰려와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간첩의 딸’이라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 나무 뒤에 울면서 도시락을 먹었다는 딸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면 차라리 내가 죽고 싶었다”
- 인혁당 희생자 유가족의 증언 중에서

그 때 그 저녁의 어둠이 어린 아이에게는 얼마나 무서웠던, 끔찍했던 시간이었을까
아이의 슬픈 이야기는 아비의 죄 때문이었을까 역사의 죄 때문이었을까
사형수 8인, 이 야만의 시간, 짐승의 시간, 악마의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다가 목이 매어 숨 죽여 울었다 학교에서 한국문학사를 이야기 할 때도 이 대목에 이르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았다 모반의 시간 야수의 시간,
고문, 증거조작, 사법살인으로 이어진 1975년 4월 9일
조국의 하늘에 찬연히 아로새겨진 통일의 별

이제 그 고통의 시간 두려움의 시간을 마침내 이기고 부활했다
더 이상 꽃샘바람에 떨어지는 철 이른 꽃잎은 없다
꽃 진 그 자리의 뀅한 눈동자도 없다
분노도 없다
부활하는 8열사의 빛과 희망이 살아있다



다소 생뚱맞은 시인용이다. 내가 쓴 추모시 전문이다.
비극적인 사법살인이 일어났던 1975년 4월 9일, 그 때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시골에서 대구로 유학 나와 고교 1년생으로 미래에 대한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어려 채 사회의식이 없어서 그런지 당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나 같은 지역인 대구에서 앞서 인용한 시에서처럼 어린 누군가는 모진 고초 속에서 청춘을 보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리고 죄스런 마음이다. 이 사건은 동시대를 산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내가 이 사건을 최초로 제대로 인지한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동년배 문학청년 가운데 하나가 희생자의 아들이었다. 그 아이가 듣지 않도록 우리끼리 은밀하게 인혁당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아이의 힘든 삶에 대해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인혁당 뿐 아니라 통혁당 사형수 가족을 만나기도 했고, 민청학련 관련 책자들과 피해자들을 만나 당대의 시국조작 사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시각의 정보도 얻었다.

지금도 분노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당시 어떤 의미에서는 변혁세력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로 인식된 자신의 고향사람인 인혁당 관계자들을 대거 사형 시켰다는 점이다. 한 짓이 분명하고 뚜렷한 민청학련이나 통혁당 관련자들에게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서도 유독 인혁당 관계자들에게 가혹하게 한 것은 이들이 박 정권의 지지기반인 대구 중심의 영남 출신이라거나 당시로서는 이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을 약점으로 삼아, 여론의 질타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대거 사형시켰다는 점이다.

폭력적인 군사정권 조차도 결국 현실적으로 조금이라도 힘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켜가고 약자들은 무자비하게 짓밟은 야만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특히 분노했던 것 같다. 이 분들이 막말로 서울 명문대 나온 서울의 유력 인사들과 연계된 운동가였다면 그렇게 쉽게 사지로 몰아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군사정권의 비인간성과 비열한 잔인성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일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는 변혁운동의 전통이나 유력한 기반도 없는 말 그대로 지방민초들인 이들이 시대의 선구로써 민족과 통일을 생각하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다고 생각하니 더 큰 빛과 영예로 와 닿는다.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끼는 '피를 강물처럼 흘려도 진실의 불은 꺼트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살아 남은 자들의 몫은 이 분들의 진실과 고귀한 정신을 되살려 여전히 분단되고 외세의 각축 아래 신음하고 있는 민족의 오늘을 성실하게 직시하면서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아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고 있습니다. 또,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CBS대구방송]의 <라디오 세상읽기>도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

서 도 원 (당시 52세)
1923년 3월 28일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 출생
대구매일신문 기자
4.19 이전 청구대학교 (현 영남대학) 학생주임, 정치학 강의
4.19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위원장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7년 언도, 2년 7개월 복역
1967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구속, 무죄판결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으로 구속 당시 침술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 집행 (경남 창녕 선산에 안장)

도 예 종 (당시 51세)
1924년 12월 25일 경북 경주시 서악 출생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4.19 이전 대구대학교 (현 영남대학) 경제학 강사
4.19 이후 경북 영주군 교육감 당선,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
1964년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3년형 (당시 삼화건설 회장)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송 상 진 (당시 47세)
1928년 9월 18일 대구시 동구 백암동 출생
대구사범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공산초등학교, 대구초등학교 교사
4.19 이후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총무국장
1964년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행, 무혐의 석방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양봉업)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우 홍 선 (당시 44세)
1931년 출생
6.25 당시 고교생으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 육군대위 예편
4.19 이후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역임
5.16 이후 수배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 1년형, 집행유예로 석방.
(당시 골든 스탬프사 상무)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하 재 완 (당시 43세)
1931년 1월 10일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1950년 입대
1957년 중사 제대, 양조장 경영
4.19 이후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상북도 협의회 부위원장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으로 구속 (당시 건축업)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4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

김 용 원 (당시 40세)
1935년 경남 함일군 출생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4.19 이후 서울대 학생민통련 참가
5.16 이후 연행, 조사받고 나옴
1964년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연행, 조사받고 나옴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경기여고 교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이 수 병 (당시 39세)
1936년 12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생
부산사범, 경희대학교 졸업
4.19 이후 경희대학교 학생민족통일연맹 위원장.
5.16 이후 구속, 혁명재판에서 15년형 선고, 7년 복역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삼락 일어학원 강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경남 의령군 신반리에 안장)

여 정 남 (당시 30세)
1945년 5월 대구시 남일동 출생
경북고,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 반대투쟁 주도이래 학생운동으로 3번 제적, 군입대
1969년 복학
1971년 4월 정진희 필화사건으로 구속
1972년 11월 10일 유신반대 포고령위반으로 구속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장 석 구 (당시 48세)
1927년 9월 19일 서울 출생
1949년 7월 단국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9월 평화신문사 기자
1955년~61년 한국일보 대구지사장, 대구일보, 민족일보 기자
1962년~63년 대구 매일일보 기자
1963년 이후 한일협정 반대와 3선개헌 반대운동에 참가
1974년 6월 14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구속
1975년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

전 재 권 (당시 59세)
1927년 10월 12일 경북 상주 출생
6.25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 복역, 동아일보 대구주재 기자
4.19 사회당 참여 (양복 옷감 도매상)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구속, 15년형 선고됨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1986년 5월 7일 복역 후유증으로 병사

유 진 곤 (당시 51세)
1937년 4월 4일 경남 김해 출생
1953년 4월 부산 사범학교 입학
1954년 부산사범 사회과학 이론연구회 '암장' 회원
1956년 부산 사범 졸업, 울산 신암국교 재직
1964년 김해연구소 재직
1974년 5월 1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 무기형
1982년 12월 13일 형 집행정지로 출소, 투병생활
1988년 5월 5일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운명

이 재 문 (당시 47세)
1934년 경북 의성 출생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1971년 민주수호 경북대구협회 선전부장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1981년 10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 (백석 천주교 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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