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때 묻은 헌옷의 부활...전국 최대 구제골목 '관문시장'의 새해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22.01.0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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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소매 3백여개, 길과 벽 곳곳에 주렁주렁 헌옷 산더미
유튜버 오며 유명세→'노인들의 동성로'에서 젊은층 '힙' 성지
손주 설빔 사는 노년층, 공장에서 입을 패딩 사는 이주민들
"아직 쓸만한 것들, 1천원의 행복...찾는 이 늘어나 반가워"


"잡으면 무조건 사야돼. 골라, 골라 단돈 1천원, 2장에 3천원"

5일 오전 대구 남구 관문시장 구제골목에서 흥정이 벌어졌다. 전국 최대 규모의 헌옷을 판매하는 구제시장. 관문시장 3지구의 모습이다. 한 60대 여성은 손주 설빔을 사기 위해 이날 시장을 찾았다.
 
   
▲ 대구 남구 관문시장 구제골목 헌옷가게 사장님들이 이야기 중이.(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값을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한순자(61)씨는 4살 손녀에게 입힐 분홍색 가디건과 거기에 어울리는 한 벌 옷을 골라 구제시장 매대 옷걸이에 걸어놨다. 한 벌 다 해도 9천원. 한씨는 일주일 전 이곳 구제시장에서 구입한 1천원짜리 니트를 입고 이날 장을 보러 왔다. 그는 "아직 쓸만한데 누가 안입으니 버린 것 아니겠냐"면서 "1천원에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하다. 여기에 뒤엉켜 있는 옷들 잘 보면 내 눈에 보물이 보인다"고 말했다. 

관문시장의 구제골목은 모두 5지구로 이뤄졌다. 어디가 어딘지 규모를 다 파악할 수 없을만큼 크다. 현재까지 등록된 상점은 280여개, 노점까지 더 하면 헌옷 도·소매 점포는 300여개에 이른다. 구불구불하고 어두운 골목길 사이가 모두 구제시장이다.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구석진 곳에도 구제옷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찼다. 길 바닥, 벽, 자바라 형태의 문틈에도 옷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 헌옷들을 수레에 옮기고 있는 구제시장 상인 이선자씨(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패션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  헌옷들을 유심히 보고 있다(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상인들과 직원들은 오전부터 바쁘다. 서울, 부산, 경북 등 전국 팔도에서 가져온 옷 보따리들을 등에 지고 손에 들고 수레로 끌며 서로 챙겨가느라 정신이 없다. 물건은 보지도 않는다. 그져 누가 많이 물건을 빨리 많이 가져가느냐의 싸움이다. 그 중에 샤x, 구x 등 유명한 명품 제품들도 섞였다. 

아기가 입던 배냇저고리,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걸쳤던 검은 상주복, 연주회에서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 색동저고리 한복에 방한용 패딩, 대학교 이름이 적힌 야구점퍼까지 헌옷의 종류는 끝도 없다. 
 
   
▲ 헌옷을 사서 바로 수선집으로 가는 손님들(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베트남 결혼이주여성 웬씨가 헌옷들을 둘러보고 있다.(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옷뿐만 아니라 접시, 그릇, 컵, 밥솥, 전자레인지, 의자, 전기장판, 식탁, 시계, 귀걸이 등 없는 물건이 없다. 한 상점에는 2m 가량 접시, 그릇, 냄비 탑을 쌓았다.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넘어질 것 같다. 손님들이 물건 값을 깍아 달라고 흥정을 하자 상인은 "할인은 안되고 새해니까 복 많이 받으시라고 수저세트 하나 더 얹어줄게"라고 말한다. 손님도 기분 좋게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을 한다.

40여년간 옷가게를 운영하는 이나경(70)씨는 구제골목 1세대다. 그는 요즘 더 바빠졌다고 한다. 헌옷이 이른바 '빈티지'로 바뀌면서 전국 각지에서 패션에 민감한 젊은층들이 대거 유입됐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주머니가 가벼운 60~70대 노년층들이 찾던 '노인들의 동성로'였지만 최근에는 10~30대 젊은층의 '힙(hip.유행에 민감하고 개성이 강한 것) 성지', '핫플레이스(뜨는 장소)'가 됐다는 이야기다.  
 
   
▲ 헌옷 한벌로 손녀 줄 설빔을 장만한 한순자씨(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상주 저고리인데 쓸만해" 남문시장 구제골목 상점에 걸린 헌옷(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특히 유튜버들이 카메라를 들고 구제골목을 소개하는 방송을 여러번 하면서 인기가 더 높아졌다. 이날도 유명 방송인이 개인 방송을 찍고 갔고, 며칠전에는 유명 트로트가수가 본인 유튜브 촬영을 했다. 누가 입지 않고 버리거나,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고 생각돼 버림 받았던 헌옷들이 관문시장 구제골목에서 가치있는 새로운 무언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서울 동묘시장 등 전국의 구제시장 상인들이 관문시장 구제골목을 찾아 물건을 사가기도 한다. 대구에 온 헌옷들이 다시 전국으로 퍼지는 셈이다. 

오후가 되자자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이주민들이 구제골목을 채웠다. 인근 서부정류장에 살거나 공단에서 일하는 이들이 많다. 베트남 결혼이주여성 웬(23)씨는 일하는 공장에서 입을 패딩을 구입했다. 단돈 5천원이다. 3살 아기가 신을 신발도 2천원에 샀다. 신발 앞쪽이 튿어져 바로 수선집으로 갔다.

헌옷은 여기저기 흠집이 있어 수선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때문에 시장 안쪽에는 수선집들이 영업 중이다. 여러명이 줄을 서 있다. 헌 커텐을 샀는데 일부가 떨어져 재봉틀로 한땀씩 꼼꼼히 매꾸고 있다. 
 
낡은 접시, 냄비, 그릇, 주전자. 모두 판매하는 물건들이다.(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낡은 접시, 냄비, 그릇, 주전자. 모두 판매하는 물건들이다.(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학생 강석호(24)씨는 패션에 관심이 많다. 요즘 '올드패션'에 빠져 관문시장 구제골목을 종종 찾는다고 말한다. 강씨는 "돈이 없을 때 1천원, 5천원만 들고 와도 괜찮은 옷들을 살 수 있다"며 "안목만 있으면 시중에서 파는 새옷보다 더 예쁜 옷들도 겟(얻다)할 수 있어 기분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이곳에서는 새옷을 파는 상점이 소수다. 그런 곳에는 '헌옷 아님', '새제품만 팜', '구제 없음' 피켓이 붙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헌옷 사이로 새옷이 반짝인다. 가격은 10배 가까이 차이 난다.
 
길, 벽, 문이 매장이고 매대다. 주렁 주렁 매달린 헌옷들.(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길, 벽, 문이 매장이고 매대다. 주렁 주렁 매달린 헌옷들.(2022.1.5)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1세대 상인 이나경씨는 "한때 경기가 너무 안좋아서 가게를 접어야 하나 고민했다"면서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면서 이제 구제옷이 유행한다고 하니 반갑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또 "누구 손때 묻은 물건들이고 옷이지만 깨끗하게 다듬고 정리하면 또 쓸만한 물건이 된다"면서 "새해에는 나이 적고 많고 따지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구제시장을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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