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부교재 관행, 이젠 바로잡아야"

평화뉴스
  • 입력 2005.05.04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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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고백5> 대구 중등 H교사.
..."부교재 강요, 교사로서 한량없이 부끄럽다”
“고등학생 한해 부교재 30-40권...특정 부교재 사전구매까지 강요하는 학교 현실”


몇일 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에게 글 청탁을 받았다. 부교재와 관련된 청탁이었다.
말꼬리에 여러 선생님에게 부탁했는데 거절당하고 선생님께 부탁드린다고 하였다. 순간 지난 해 ‘기자들의 고백’ 시리즈 마지막 편에 유기자가 쓴 글 청탁과정의 여러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수락하였다.
수락하고 나서 원고마감일이 되니, 큰 부담이 되었다. 무엇보다 부교재와 관련된 고민과 갈등을 지속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나이기에 ‘현장감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아울러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조직내부의 은밀한 부분이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부교재와 관련된 교직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교육자적 양심에서 부교재 채택료 거부합니다.”
"그래, 니 혼자 깨끗하게 살겠다? 좋지. 니 혼자 잘 봐라"
“학교밥 1,2년 묵을 것도 아닌데...다른 과에서는 이야기 다 됐다 하더라”


<장면 1>
여러 명의 교사가 모여 있다. 공교육정상화와 새로운 학교현장 만들기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 현장변화를 위해서 우리들이 할 일은 현장 부조리를 일소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부교재 채택료 거부라고 생각합니다. 학교현장 변화의 시발점은 우리들의 부조리는 없애 나가는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천가능한 일부터 합시다.
= 쉽지 않습니다. 학교선후배 등으로 얽혀 있는 교직사회의 특성상 쉽지 않아요. 차라리 부교재 채택료를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희사합시다.
- 안됩니다. 과정과 결과를 모두 중요시하는 학교현장에서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뿐입니다.
= 그럼 교과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환원할 방법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요.
- 그것도 안됩니다. 우리들의 본 의도를 학교현장의 부조리를 하나하나 일소시켜가는 것인데, 줄기는 내버려두고 가지만 친다고 해서 해결되겠습니까? 우리들부터 부교재 채택료를 거부하는 것만이 현장변화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 한번 해 봅시다.

- 주임선생님 이번부터 저는 교육자적 양심에서 부교재 채택료를 거부합니다.
= 그래, 니 혼자 깨끗하게 살겠다. 좋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하더니. 니 혼자 잘 해봐라. 원 참,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 튀긴다 하더니. 이거...
- 주임선생님 이해해라. 교직밥 더 묵은 내가 이야기하는데 니 혼자 칸다고 바뀌는 것 아니다. 학교밥 1,2년 묵을 것도 아닌데. 다른 과에서는 이야기 다 됐다 하더라. 니도 인제 고만해라. 다른 과에 한 번 물어봐라....

<장면 2>
- 교장선생님 이번 여름 자율연수 기간동안에 다른 지역의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시간에 활용한 부교재를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수업시간에 활용할려고 하는데 사용을 승인해 주십시오.
= 안됩니다. 선생님들의 열정과 노력은 높이 평가하지만, 수업시간에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 지금 출판된 부교재가 학교현장에서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안됩니까?
= 출판된 교재는 공인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인정하고 있지만, 선생님들이 만든 교재는 공인되지 않은 것이라 사용할 수 없습니다.
- 그럼 프린트물 묶은 것이라 여기시고 학교에서 복사하여 제본해서 활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학교에 그럴만한 예산이 어디 있습니까?
- 그럼 실비로 학생들에게 거두면 안되겠습니까?
= 그것도 안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판매한 것이 되기 때문에 안됩니다. 필요할 때마다 인쇄실에 복사신청해서 사용하십시오.
- 결과적으로 경비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학교에서 제본 좀 해 주십시오.
= 안됩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어이, 김사장님 별일 없지요? 요즘 잘 돼 갑니까?”
“네, 도와주신 덕분에 그럭저럭 합니다. 선생님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장면 3>
아이들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을 점검해보면 각 과목별로 수업시간마다 나누어 준 프린트가 굉장한 분량이다. 이 프린트는 대부분 기존 참고서나 문제집을 오려붙여서 인쇄한 것이다. 갱지에 인쇄된 프린트를 순서대로 철을 하기도 신경 쓰일 뿐만 아니라 해답이나 풀이 과정도 없다. 이 프린트를 가지고 수업시간에 제대로 설명을 듣지 않거나 설명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원리나 풀이 과정을 제대로 적어놓지 않는다면 체계적인 복습이 사실상 어렵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만으로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학습효과를 높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보조 교재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교육당국에서는 부교재 채택에 따른 부조리를 없앤다는 구실로 교과서 외의 부교재 채택 수업을 금지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가뜩이나 교육 개혁이다 뭐다 하여 잡무에 시달리는 교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프린트 교재를 만든다. 학생들은 우왕좌왕하며 이책 저책을 사들고 학원를 다니면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퍼붓고 있다. 차라리 각 과목별로 학교에서 부교재 한 권씩을 채택하여 교과서와 함께 체계적으로 수업한다면 학습 효과도 올리고 학생들에게 경제적 부담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학생들이 과목별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각자 채택하는 상황에서 학교에서 부교재 채택을 금지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부교재 채택 금지는 교육적 낭비요 인적낭비요 물적낭비이다. 이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식이다.

<장면 4>- 학기 초 어느 학교 교무실.
-교감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어이 김사장님 별일 없지요. 요즘 잘 되갑니까?
- 도와주신 덕분에 그럭저럭 합니다. 그럼 여러 선생님께 교재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박선생님 올해도 부탁드립니다. 예. 김선생님도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신 교재 갖고 왔습니다...

<장면 5>
대구 수성경찰서는 “지난 19일 대구 모 여고 박 모교사가 이 모와 정 모 교사를 폭행했다는 고소가 들어와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피해 교사가 제출한 고소장에 따르면 박 교사는 당시 학교 운영문제로 언쟁을 벌이던 중 이들을 폭행했다. 문제가 된 학교는 최근 주간학습지 부교재 채택과 관련, 교사들이 리베이트를 수수했다는 제보에 따라 대구시교육청이 감사를 실시한 곳이다.

<장면 6>
- 야들아 책상 위에 무슨 책이 이리 많노? 꼭 공부 못하는 것들이 책상 위에 책 많이 놓고 그라제.
= 쌤, 이거 오늘 배울 문제집들인데요.
- 그래. 시끄럽다. 수업하자.

<장면 7>
남의 집 식당 일에 지친 학부모가 밤늦은 시각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서점에 달려간다.
- 아이가 책 사 놓으라고 전화해서 일하던 중에 서점 문 닫을까 급히 돈 빌려 책 사러왔습니다
= 방송에 아들 교육비 땜시로 ‘주부 탈선한다’카더니, 이게 남의 일 아니네...

“특정 부교재 사전구매를 강요하는 학교...더 부끄러운 건 나도 모르게 익숙해가는 현실”
“10년 전, 내 아이 학교 갈 때는 변할거라 믿었는데...이제 10년의 희망을 꿈꾸며 다시 시작한다”


10년전 교직에 입문하여 의사와 상관없이 부교재가 채택되고 그와 관련된 채택료가 전달되었을 때의 화끈거림이 오늘 새롭게 전해온다. 소수로 구성된 교과라서 한 명의 강력한 저항으로 부교재와는 절연했다.

이번 학기초 교사 동우회 술자리에서도 부교재 채택과 관련된 토의가 있었다.
여전히 ‘학교밥 1,2년 묵을 것도 아닌데 내 혼자 칸다고 되나’라는 자조 속에 1명이 어렵게 주임교사에게 ‘부교재 채택 거부 선언’을 했다는 말로 동참을 호소했으나, 결론은 조직적인 선언이 아니라, 개인적 판단에 맡기자고 마무리 발언이 쏟아졌다.

불법찬조금 문제가 최근 불거져 언론에 회자되면서, 청와대.감사원 등의 중요과제로 다루어져 학교를 압박하여 문제해결의 단초를 제공했듯, 부교재 문제로 그렇게 위에서 해결해야지 우리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길에서 고등학생을 세워놓고 학교에서 채택한 참고서를 1년 동안 몇 권이나 사느냐고 물어보라. 적게는 10여권 일 테고 많게는 30∼40권은 될 것이다. 일부 교과에서는 년간 4∼5권 혹은 10권까지 부교재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특정 부교재의 사전구매 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사로서 한량없이 부끄럽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러한 조건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 가는 것이다.

10년 전 내 아이 학교 갈 때는 분명히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 나름의 정열을 불태운 바 있지만, 그 희망이 무너진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새롭게 10년의 희망을 꿈꾸며 다시 시작한다.

참고서와 부교재는 말 그대로 참고하는 것이며 보조하는 것이다. 어느새 객이 주인자리를 차지하고 큰소리치는 현장을 학교에서 만들고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교과서 응용은 창의적인 교사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획일적인 부교재 풀이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교과서와 관련된 좋은 책들을 다수 추천하여 개인차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고 생각하게 하며 해결하는 방법을 지도한다면 어떻겠는가?

당장은 힘들 것이다. 수능점수와 직결되지 않을 수도 있고, 더 노력해야 하니 피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제자들은 성실하고 양식 있는 스승을 만났음을 감사할 것이다.

방금도 교무실에 부교재 대리점 직원이 와서 ‘김선생님 자리 여기 맞습니까’하며 묻는다. 그리고 부교재 여러 권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다른 곳으로 간다. 그 공간에 나도 있다.

<대구지역 중등학교 H교사>
* 이 글은, 대구지역 한 고등학교에서 10여년째 언어영역을 가르치고 있는 30대 후반의 교사가 쓴 것으로,
부교재 채택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학교 현실에 비춰 담아주셨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10년의 희망’이 꼭 이뤄지길 바라며 글을 써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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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고백 1> - 대구 초등 L교사 ... "교사라고 말하기 부끄럽다"
<교사들의 고백 2> - 구미 중등 L교사 ... "게으른 나를 탓한다"
<교사들의 고백 3> - 포항 중등 K교사 ... "학교는 죽은 시인의 사회"
<교사들의 고백 4> - 영주 초등 A교사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교사들의 고백 5> - 대구 중등 H교사 ... "잘못된 부교재 관행, 이젠 바로잡아야"

“교사를 찾습니다”

평화뉴스는 2004년 한해동안 [기자들의 고백]을 연재한데 이어,
2005년에는 연중기획으로 [교사들의 고백]을 매주 수요일마다 싣습니다.
교육의 가치는 ‘학생’에게 있으며, 교사는 사람을 가르치는 ‘성직’이라 믿습니다.
학생들에게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 교무실과 교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연들.
그리고, 우리 교육계와 학부모, 독자들이 함께 고민해봐야 할 ‘교사들의 글’을 찾습니다.

남을 탓하기는 쉽지만, 스스로 돌아보고 남 앞에 고백하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고백들이 쌓여갈 때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 믿으며,
대구경북지역 현직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독자들께서 좋은 선생님들을 추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글을 쓰신 분의 이름은 실명과 익명 모두 가능하며,
익명의 신분은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의 : 평화뉴스 (053)421-151 / 011-811-0709
글 보내실 곳 :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대구경북 인터넷신문 PN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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