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만에 다시 찾은 평양..."

평화뉴스
  • 입력 2005.06.20 01: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15 민족대축전] 다녀온 범민련 한기명(76) 의장...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간 평양, 언제 또 찾아갈 지..."

“평양 순항공항에 도착하자 옛 어린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울컥해 눈물이 흘렀어...”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범민련 대경연합) 한기명(76) 의장.
한 의장은 일제시대인 지난 1942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평양을 다녀왔다. 그리고 63년만인 지난 6월 14일 [6.15 민족대축전]을 위해 다시 평양 땅을 밟았다. 그래서 더 남달랐는지 모른다. [6.15 민족대축전 남측준비위원회 대구경북본부] 대표로 평양을 다녀온 한 의장에게 소감을 들어봤다.

평생 통일만 그리며 살았다는 한 의장.
한 의장은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이지만, 6.15선언 5돌을 맞아 평양에서 열린 [민족대축전] 나흘간(6.14-17)의 일정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 의장에게는 63년전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범민련의 이름으로 평양을 다녀온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의미였다.

한 의장은, “범민련이 아직까지 이적단체로 규정돼 있는데, 내가 범민련의 이름으로 평양을 다녀온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라며 이번 행사가 통일을 위한 아주 소중한 걸음을 뗀 것이라고 의미를 새겼다.

한 의장은 또, “대표단 규모가 인원이 줄어든 것은 아쉬웠지만, 몇 명 가느냐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북이 함께 모여 통일로 가는 축제를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북측이 행사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었겠지. 남북이 축제를 하려는 와중에 한미연합훈련이나 스텔스기의 추가 배치 하는 문제가 터졌으니...북쪽에서 이런 문제가 얼마나 민감하게 생각됐겠어? 북측이 이번 행사를 그만둘려고 까지 했다고 하던데, 그나마 행사가 잘 치러져 정말 다행이야”...

특히, 이번 행사 막바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자 회담 복귀와 남측 답방의 뜻을 밝힌 것도 한 의장에게는 큰 희망이다.

한 의장은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겠다는 북쪽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면서, “한 민족이 그렇게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게 얼마나 큰 다행이고 희망이냐”고 말했다.

또, “김 위원장이 남쪽을 답방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북한을 동포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면서, 그 때가 적절한 답방 시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의장은 끝으로, 대구경북지역 청년들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통일은 ‘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이뤄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야 한다”면서, “우리 지역 젊은이들이 한반도의 전쟁없는 평화 통일의 길을 꼭 열어가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나흘간의 빠듯한 평양 일정을 마치고 돌아 온 한 의장은, 어제 부산을 다녀왔다고 한다.
범민련 중앙위원인 하태연(80) 선생의 팔순잔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지쳐있었다.
“나는 통일 밖에 모르는 사람...6.15선언이 최고의 보람”
“일제 만행을 보며 자란 한 의장...여고시절 통일운동, 6.25 뒤 좌익으로 몰려 모진 고문...”

한 의장은, 일제시대 서울에서 태어나, 동네 언니들이 정신대로 끌려가는 모습과 농민 수탈의 일제 만행을 그대로 보며 자랐다고 한다. 그 속에 만주 독립운동 소식을 들으며 민족의식을 키웠고, 해방된 뒤 여고시절에는 진보적 학생들의 모임인 ‘민주학생연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진 뒤 좌익세력으로 몰려 서대문형소소를 시작으로, 대전과 부산, 마산형무소를 거치면서 여자의 몸으로 견디기 힘든 모진 고문을 받았고, 아직까지도 손등에는 그 상처가 남아있다.

5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고 겨우 병보석으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한 의장은, 통일의 뜻을 같이 하는 남편을 만나 대구로 온 뒤, 시어머니와 시동생, 시누이까지 수발하며 단칸방에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고, 박정희 정권 때는 사상탄압으로 붙잡힌 남편의 10년 옥바라지까지 했다. 그동안 안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힘든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한 의장의 긴 고난도 통일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군사정권의 혹독한 시기를 지나, 1987년 6월항쟁 이후 그동안 가슴속에 숨겨놓아야만 했던 통일의 염원을 대구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해, ’89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청년들의 부모를 후원해주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91년 범민족 대회에 참여 이후 ’93년 양심수 후원회를 조직하고 ’95년에는 범민련 대구경북연합을 결성해 지금까지 통일운동에 힘쓰고 있다.

한 의장은 평소에 늘 말한다. “나는 통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6.15선언이 최고의 보람”이라며 통일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꼿꼿한 할머니.
“이제 언제 또 찾아가 볼 수 있을지...그저 빨리 통일이 돼야 하는데...”

63년의 세월 넘어 다시 찾은 평양이 얼마나 애뜻했을까.
돌아오는 그 길에는 평양 순항공항의 눈물이 또 얼마나 사무쳤을까.
한기명 의장. 팔순을 바라보는 어느 할머니의 소원이 꼭 이뤄지길 더 바라게 된다.

글.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6.15 남.북.해외 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대구경북본부] 결성식(2005.5.6)...가운데 중앙이 한기명 의장
[6.15 남.북.해외 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대구경북본부] 결성식(2005.5.6)...가운데 중앙이 한기명 의장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