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독도 어민학살, 진실은?"

평화뉴스
  • 입력 2005.07.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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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폭격으로 독도 주민 2백여명 숨져"...
"보상은 커녕 진상규명도 안돼...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미군정기인 지난48년 6월 8일. 우리 어민들은 힘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너무나 큰 비극으로 겪어야 했다.

미 공군기가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에게 폭탄을 퍼부어 2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하지만,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안된 이 사건은 반세기가 넘도록 유족들 가슴에 응어리져 있다.

지난 6월 8일 독도에서 열린 [독도 폭격 사건 희생자 위령제](사진제공. 브레이크뉴스 대구경북)
지난 6월 8일 독도에서 열린 [독도 폭격 사건 희생자 위령제](사진제공. 브레이크뉴스 대구경북)

지난 6월 8일 독도에서는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 [한국외대 독도연구회]에서 주최한 '독도폭격사건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박창희 교수의 제문 낭독으로 시작된 이날 위령제는 무속인 장경자의 진오귀굿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무속인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 희생 영령들의 한 맺힌 사연들은 주위를 숙연케 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 이예균 회장은 “독도폭격사건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의 우리 백성들이 생명을 잃었다. 최소한 진상규명이라도 제대로 이루어져야 그들의 한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의 주장대로 독도 폭격사건은 그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왔지만 이 사건은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이 사건도 50년 4백여 명의 희생자를 낸 노근리 사건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진실을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족들의 한결같은 바램이다. 유족들은 이 문제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수로 던진 폭탄?
역사는 그것을 독도 오폭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수로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실수였는지 의도적인 폭격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독도의 악몽에 대해 보도한 <신천지>라는 잡지를 들춰보자.

‘조선 동해상에 있는 독도 부근 해상에 있는 우리 나라 어선을 미국 극동항공대의 중폭격기군이 2만 3천 척 상공에서 폭격하야 11척의 어선을 침몰시키고, 14명의 조선인 어부를 살해한 일로 인하여 전국 동포는 불안으로 민심이 들끓었다.’(신천지 1948년 6월 30일)

폭격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어민들은 옷가지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총알이 지나간 뱃전은 헝겊으로 구멍을 막아 울릉도로 도망쳐왔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 고(故) 김도암은 “태극기를 흔들어 목메어 소리쳤지만 야속한 비행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총을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숫자 등 폭격의 실상이 상당 부분 숨겨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995년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과 한국외국어대 ‘독도연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기록한 결과 폭격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어민은 무려 2백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안돼 50여 년 간 유족들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이 사건은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장학상(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이 사건 직후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로 돌아와 세상에 알려졌다.

아비규환의 현장
장학상 등 생존자 2명은 “울릉도 방향에서 날아온 12대의 폭격기가 2개조로 나눠 6백m 상공에서 선회하며 융단폭격, 조업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50여 척의 동력선에 척당 5~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2백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정은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폭격사실 등을 부인했다. 그러다 미 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고 발표했을 뿐 진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1948년은 미군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쥐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항의할 정부조차 없었다. 사건 직후 미군 당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 울릉도와 독도에서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배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배상 내용, 독도를 연습대상으로 지정한 경위, 사고에 따른 내부 처벌 등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울릉도 주민에 따르면 독도에서 억울하게 죽은 어민들은 지금까지 입을 닫아야 했다.

"독도 희생자 위자료가 당시 미국 돼지 한 마리 값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자서전에 의하면 포항 주둔 미 육군 소속의 몇 명의 장교와 사병이 울릉도에 들어와 배상문제를 처리했다고 한다. 당시 어른은 5백환, 미성년자에게는 3백환의 위자료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돼지 1마리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1950년 4월 25일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미 제5공군에 이를 조회했다. 미군은 같은 해 5월 4일자로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었다는 것과, 독도는 극동 공군의 연습 목표로 돼 있지 않았다”는 공식 회답을 받았다.

이 같은 미군기 독도 폭격사건은 57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이 사건도 노근리 사건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하고, 피해 유족들에게 보상 등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글.사진 [브레이크뉴스 대구경북] 박희경 기자

* 이 글은 [브레이크뉴스 대구경북]에 실린 전문으로, [브레이크뉴스]의 동의를 얻어 그대로 싣습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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