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기사, 유죄만 있고 무죄는 없다” (7.26)

평화뉴스
  • 입력 2005.08.0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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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비평] 성폭력 가해자의 여성단체 고소사건...
[매일신문.영남일보], 사과성 후속 보도

“대학 교수 성희롱 사건 관련, 前 여성단체 대표 등 벌금형”(매일신문 7.19)
“허위사실 인터넷 게재, [대구여성의 전화] 前대표.회원 벌금”(영남일보 7.19)


이 제목만 봤을 때, 여성단체는 성희롱과 관련있거나 허위사실을 유포시킨 ‘문제 있는’ 집단처럼 보인다.

때문에, 이 기사가 보도된 뒤 이 여성단체에는 회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고 상근자들은 해명하기에 바빴다.

결국 이 여성단체는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편집국장을 찾아가 보도의 문제를 제기했고, 매일신문은 다음 날 20일, 영남일보는 그 다음 날 21일에 각각 이 재판과 관련한 후속보도를 내보냈다.

“비방할 목적없이 사실공개, 공인이면 공공이익에 부합” 조교 성폭행 판결 의미(매일신문 7.20)
법원 “대학교수도 공인”...대구여성의 전화 “범위 넓혀져 긍정적”(영남일보 7.21)


지역의 유력 일간지 2곳이 잇따라 사과성 후속보도까지 한 재판. 어떻게 된 것일까?

지난 2000년 대구 2군데 대학 2명의 K교수가 조교와 제자에 대해 각각 성폭력을 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단체인 [대구여성의 전화]는 이 사건과 관련해, 해당 교수의 실명과 피해자에게 들은 성폭력 의혹을 이 단체 인터넷 홈페이지와 회지 등에 실었다. 그러자 가해자인 이들 두명의 K교수가 이 여성단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른 바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 사건’이다.

여성단체는 1심에서 벌금 200만원, 2심에서 벌금 100만원씩을 각각 선고 받은 뒤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일부 무죄’ 취지로 사건을 대구지방법원에 돌려보냈고, 대구지방법원은 지난 7월 19일 이 사건에 대한 파기 환송심 최종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과 대구지방법원의 판결 요지는 크게 두가지.

첫째, ‘성폭력 가해자인 교수의 실명과 성폭력 내용을 공개한 것은 무죄’라는 판결이다.
즉, 시민단체가 가해자의 실명과 사실을 적시해 유포했더라도, 그것이 ‘성폭력 근절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면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공익목적이라 하더라도 사이버상에서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면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는 판결이다.
이는, [대구여성의 전화]가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에 따라 성폭력 가해자의 행동 등을 인터넷에 공개한 것에 대한 판결인데, 법원은 이같이 ‘진술만 있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은 ‘허위사실’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은, ‘교수’가 공인(公人)이며 시민단체가 ‘공익 목적’으로 성폭력 가해자인 공인의 실명을 공개한 것은 무죄라는 점과, 피해자 진술이 있더라도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유포한 것은 ‘허위사실에 따른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매일신문 7월 19일자
매일신문 7월 19일자
그러나, 지역 언론은 이 두가지 의미 가운데 한가지만 보도했다.

먼저, 매일신문 7월 19일자(5면-사회면) “대학 교수 성희롱 사건 관련, 前 여성단체 대표 등 벌금형” 기사를 보자.

[대구지법 제4형사부는 19일 모 대학 교수의 조교에 대한 성희롱 사건과 관련, 허위사실을 인터넷에 게재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대구여성의 전화 전 공동대표 김모(50.여) 교수 등 2명에 대한 파기 환송심에서 각각 벌금 7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공익목적이라 하더라도 사이버상에서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는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매일신문은 이 기사 뒷부분에 사건의 개요와 여성단체의 입장 등을 싣기도 했지만, 이번 판결의 또 다른 의미인 ‘공익목적의 성폭력 가해자 실명공개는 무죄’라는 내용을 전혀 싣지 않았다.

영남일보도 판결이 나던 7월 19일(8면-대구면), 매일신문과 거의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영남일보 7월 19일자
영남일보 7월 19일자
[대구지법 제4형사부는 19일 지역 모 대학 교수의 조교에 대한 성희롱 사건과 관련, 허위사실을 인터넷에 게재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대구여성의 전화 전 대표 김모 교수와 이모씨 등에 대한 파기 환송심에서 각각 벌금 7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공익목적이라 하더라도 사이버상에서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는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물론 영남일보도 이날 기사 뒷부분에 사건의 개요와 여성단체의 입장을 실었지만, ‘실명공개가 무죄’라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매일신문과 영남일보가 짜맞춘 듯 똑같은 흐름과 내용이다.

게다가, 이들 두 신문은 ‘성폭력 사건’을 ‘성희롱 사건’으로 표현해 여성단체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성폭력과 성희롱은 엄연한 차이가 있으며, ‘성폭력 사건’을 ‘성희롱 사건’으로 바꿔 쓸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매일신문과 영남일보는 7월 19일 기사를 내보낸 뒤 [대구여성의 전화]로부터 공식적인 항의를 받았다.
그리고, 매일신문은 다음 날인 7월 20일, 영남일보는 이틀 뒤인 7월 21일에 각각 이 재판의 의미를 되새기는 후속기사를 내보냈다.

“비방할 목적없이 사실공개, 공인이면 공공이익에 부합” 조교 성폭행 판결 의미(매일신문 7.20)
법원 “대학교수도 공인”...대구여성의 전화 “범위 넓혀져 긍정적”(영남일보 7.21)


매일신문 7월 20일자 4면(사회면)
매일신문 7월 20일자 4면(사회면)

이들 두 신문은, 7월 19일 기사에서 보이지 않던 ‘실명공개 무죄’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했다.

특히, 매일신문은 “공인일 경우 비방할 목적없이 사실을 공개하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해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설명과 함께, “국립대 교수가 제자인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은 국민이 알아야 할 공공성, 사회성을 갖춘 공적 관심사이기 때문에 유죄(명예훼손)으로 볼 수없다”는 대법원의 취지까지 실었다.

영남일보 7월 21일자 8면(대구면)
영남일보 7월 21일자 8면(대구면)

또, 영남일보도, “대학교수도 공인으로 볼 있다...시민단체의 운신의 폭을 넓게 인정하려는 경향을 보여주는 판결”이라며 이번 재판의 의미를 더해놨다.

하나의 재판에서 나온 ‘무죄와 유죄’의 판결.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사실 그대로’ 알려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들 두 신문이 사건 당사자의 항의를 받고 ‘이례적으로’ 사과성 후속보도를 한 것은 다행이다.

많은 정보를 다루는 언론.
이번 일을 계기로, 언론이 ‘잘못을 인정하고 바르게 고치는’ 긍정적 관행이 자리잡기를 바라게 된다.
<평화뉴스 매체비평팀>
[평화뉴스 매체비평팀]은, 5개 언론사 6명의 취재.편집기자로 운영되며,
지역 일간지의 보도 내용을 토론한 뒤 한달에 2-3차례 글을 싣고 있습니다.
매체비평에 인용된 기사 가운데 '기자 이름'은 편집과정에서 지웠음을 알려드립니다.
매체비평과 관련해, 해당 언론사나 기자의 반론, 지역 언론인과 독자의 의견도 싣고자 합니다.
의견이 있으신 분은 pnnews@pn.or.kr로 글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 평화뉴스(www.pn.or.kr)

(이 글은, 2005년 7월 26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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