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고려호텔에서 생긴 일”

평화뉴스
  • 입력 2005.08.04 09: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용락 칼럼 18]...
“60년만의 민족작가대회, 그러나 이기형 시인의 눈물”

2005년 7월 25일 낮 12시쯤, 나는 평양시내에 있는 고려호텔 1층 로비에 앉아 있었다. 지난 20일부터 5박6일 일정의 ‘민족작가대회’가 끝나는 날이다. 민족작가대회는 남과 북 일본, 미국 거주 문인 150여명이 분단 이후, 정확하게 1945년 12월 13일 이후 처음으로 만난 대회였다. 그래서 이날 점심은 특별히 유명하다는 평양 단고기(개고기)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전 날 밤, 단고기조와 단고기를먹지 않는 냉면조로 나누어 식당도 별도로 정해 두었다. 방북 5박6일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점심 식사도 모두 모여 집단적으로 움직여야 했으므로 나는 우리 조원이 다 모일 때까지 남보다 조금 먼저 로비에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참고로, 고려호텔은 평양역 부근에 있는 44층 쌍둥이 현대식 건물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검소하고 청결한 호텔이었다.

방북 문인들은 17층에서 22층 사이에 주로묶었다. 방북 팀은 지도부 팀과 언론인 팀을 제외하고 8명이 한 조로 편성돼 모두 8조가 버스탑승을 비롯, 조별로 함께 행동했다. 나는 1조 조장이었는데 조장은 비교적 젊은 문인으로 일종의 ‘따가리’ 역할을 했다.

이번 방북단 가운데 최고령자는 이기형 시인이다. 우리 나이로 89세이다. (이기형 시인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자료는 <경향신문> 04. 10. 27일자 ‘나의 生, 나의 藝’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분은 1조 소속이어서 내가 비교적 가까이서 모셨다. 물론 방북 전에도 친밀한 사이였다. 나도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배 시인이지만, 선생께서도 내가 관여하고 있는 계간문예지 <사람의문학>을 좋게 봐주시고, 지난 80년대 이래 지방에서 고생한다며 나를 자주 격려해 주셨다.

이번에도 고려호텔에 도착한 첫날 나를 따로 가만히 부르시더니 “김 시인, 서울의 문학은 다 썪었어, 창비를 포함해 서울 문학은 다 죽었어. 신인을 뽑는 것을 봐도 그게 어떻게 시냐? 내가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비교해서 써둔 글이 있어. 뭐라 대구의 <사람의문학> 이랬지. 그거 진짜 잘하고 있어. 뭐라 순천인가 광주에도 그와 비슷한 잡지가 있던데...”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하고 객관적인 수준에서도 미흡하지만 10년 이상 지역문학과 삶의 문학을 지향해온 <사람의문학>에 대한 덕담이었다. 어쩌면 내가 며칠간 1조 따까리를 해야 되니 괜히 미안해서 격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내가 이기형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시집보다는 선생이 쓴 《몽양 여운형 평전》(창비간)이라는 몽양의 약전이었다. 경력을보면 신문사 기자도 하고, 젊어서 몽양의 사상에 감화를 받고 좌파 문인들과 폭 넓게 교류를 한 것 같았다. 시집도《망향》《봄은 왜 오지 않는가》를 비롯 여러 권을 낸 말 그대로 원로 시인이다.

연세가 여든 아홉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했고, 백두산에도 젊은이보다 더 거뜬하게 올랐다. (<한겨레신문> 05. 8. 3일자에는 선생이 백두산 정상에서 북의 대표적인 시인, 남쪽 전남 장성 출신으로 월북한 오영재 시인과 각각 남북에 어머니를 두고 고향을 떠나온 동병상련을 새기며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기사가 있다.)

선생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한국 전쟁 이후 남쪽에 남으셨다. 그런데 북측에서 결혼을 해(첫 부인은 여운형의 6촌 여동생) 남매를 두고 남쪽에서 다시 결혼해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서울 모 사립대 교수이고 며느리는 변호사라고 했다. 많은 여비가 든 평양 민족작가대회 참가도 아들과 며느리가 용돈을 비교적 넉넉하게 준 덕이라고 한다. 선생이 연세에 비해 건강한 것은 통일이 되면 북에 있는 자식도 만나고 특히 자신만이 알고 있는 선친의 묘소를 남북에 있는 자식에게 알려주겠다는 일념으로, 요즘도 서울 북한산을 하루 한 번씩은 오르내릴 정도로 체력을 단련한다고 했다.

선생은 아마 평양작가대회 참가할 때 북측에 있는 따님(67세 정도)을 만날 수 있다는 언질을 북측의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가슴에 간직한 채 평양에 도착했다. 금새 만날 것만 같던 따님을 못 만나고 시간은 어느덧 닷새가 지나고 이제 마지막 점심 식사만 하면, 오후 4시 비행기로 남측으로 귀환하게 되는 시점에 선생께서 로비에 앉아 계셨고 우연히 내가 그 맞은편에서 선생을 지켜보게 되었다.

낮 12시 쯤, 외모로 보아 약간 고위직처럼 보이는 북측 장년의 남자가 선생께 다가가더니 뭔가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 사내가 떠남과 동시에 선생의 고개가 앞으로 떨어지듯이 숙여졌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나는 선생의 쓰고 있는 둥근 모자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89세의 야윈 두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는 것은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아, 선생은 울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던 딸과의 만남이었을까? 방금 전까지도 만남을 기대하면서 얼마나 설렌 마음이었을까? 60 여년 만에 딸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그 현장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어깨를 가늘게 떨며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울고 있는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내 곁에 앉아있던 강영주 교수(상명여대, 벽초 홍명희 연구자로 유명하다)가 홀을 건너가 선생 곁에 앉아 선생의 손을 꼭 쥐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있던 강 교수는 다시 건너편 소파로 옮겨와 앉더니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의 두 눈에서도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나는 남들이 볼세라 황급히 뒤돌아서서 눈물을 닦고 태연한 척 했다.

어느새 많은 인원들이 로비에 모였다. 혹자는 이 비극적인 사태를 눈치 챈 것 같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유명한 단고기 점심과 이제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생각으로 약간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완전 탈진한 선생은 점심도 못 먹을 듯이 쳐져 있었다. 나는 왼쪽 어깨가 쇄골파열로 부상 중이어서 선생을 몸으로 부축하기 힘들었다. 실무단의 일원인 방현석 소설가가 상황을 눈치를 채고 선생을 부축해 다시 18층 숙소로 올라갔다. 남들은 모두 식당으로 향하는데,

버스에서 도종환 시인이 이기형 시인과 관련한 북측의 처사에 대해 호텔 앞에서 연좌농성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로 분노를 나타냈다. 이 말을 곁에서 들은 북측 민화협 소속 여성안내원이 연좌가 무슨 뜻이냐고 내게 물었다. 또 대회 기간 중 비교적 가깝게 지냈던 책임자급 중년 사내 안내원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런 일은 실무급에서 정하는 일이라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라며 슬며시 외면했다.

이렇게 해서 이기형 시인은 결국 따님을 만나지 못하고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1조 조장인 내가 평양 순안공항 대합실에서 마지막으로 인원을 점검하면서 이기형 선생의 얼굴을 마주하자, 거창하게 생각됐던 60년 만의 민족작가대회, 백두산, 남북화해, 협력, 통일... 이런 말들이 갑자기 휑하니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머리 속이 텅 비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아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고 있습니다. 또,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CBS대구방송]의 <라디오 세상읽기>도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