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의 새벽, 일월이 우릴 함께 비췄다”

평화뉴스
  • 입력 2005.08.0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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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의 [남북민족작대회] 다녀온 고은 시인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이 최우선”

이대로 쪼개어진 절반짜리로는 더 이상 못살아
돌아쳐
못난 가시철망 조용히 걷어내어라
못난 내 마음 속 굳은 벽 녹여
거기 문 연 푸른 들녘이거라
오늘 새벽 4시 백두영봉 정수리에 꽂히듯 올라
내 조국 전체를 깡그리 바라보며 바람 부른다
(다시 백두산에서 中, 고은 作)

고은 시인은 남북문학교류가 늦은만큼 다른 것들을 추동하는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고은 시인은 남북문학교류가 늦은만큼 다른 것들을 추동하는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89년 3월,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을 열기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던 5명의 남측 대표단(단장 고은 시인, 신경림 시인, 백낙청 평론가, 현기영 소설가, 김진경 시인)과 30여명의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들이 파주의 ‘여우고개’에서 경찰에 막혀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이 쓰린 과거를 딛고 그로부터 16년만인 2005년 7월 20일 평양과 백두산, 묘향산 일대에서 북측 작가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100명의 문인들이 파주 산길이 아니라 평양-인천간 서해직항로를 통해 평양에 입성해, 해내외 작가들의 공동조직인 ‘6.15민족문학인협회’ 발족에 합의하고 기관잡지인 ‘통일문학’공동편찬을 약속한 것은 남북 문학사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89년 당시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 단장을 맡았던 고은 시인은 길게는 60년, 가깝게는 16년만에 이뤄진 남북 작가들의 상봉에 대해 88년 7월 2일 남북작가회담 개최를 제안한 이래 뿌려진 통일의 씨가 거두어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고은 시인은 89년 남북작가회담을 주도한 혐의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돼 구속된바 있으며 90년대 중반 사면된 뒤 민족문학작가회의 통일위원장을 맡아 작가대회를 재추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시인은 “북 작가동맹 간부들 역시 열정을 다해 남쪽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았고 우리 역시 북쪽의 정성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여러번 만났다”며 2005년 민족문학작가대회가 열리기까지 남북 작가들의 행보를 회고했다.

민족문학작가대회는 2004년 8월 23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김일성주석 조문파동과 탈북자 대량입국 문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근 1년간을 표류했다. 북녘땅에 가지고 갈 각종 기념품들이 창고에서 먼지만 맞고 있는 동안 작가들의 마음도 그늘져 갔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달 23일 남북 작가들이 백두산에서 함께 새벽을 맞은 순간에 대해 고은 시인은 “일월이 우리를 함께 비추고 천지는 안개자락 하나 없이 투명한 전체의 모습으로 우리를 떠받쳐 주었으며 이런 풍경의 절정에서 남북이 한데 어우러지는 잔치가 됐다”며 “아마 현대 한국문학사, 분단 60년사, 분단 문학사를 통틀어 그런 황홀한 문학적 사건은 처음이었다”고 평가했다.

민족문학작가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남북 작가들은 이제 ‘6.15민족문학인협회’를 발족시키고 남북공동 문예지 ‘통일문학’을 편찬할 과제를 지게 됐다. 문학은 이데올로기가 직접 투영되는 장르이기 때문에 남북 공동편찬에 무리가 따를 것이라는 일각의 지적도 있지만 고은 시인은 “어려움을 피할 생각도 없고 이를 이겨서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어려움이 없어서는 재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5일 오전 10시 서초구 남부터미널 인근에서 고은시인과 만나 분단시대 남북 작가들이 헤쳐온 고난과 통일을 향한 여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89년 남북작가회담 좌절, “그러나 통일의 씨는 뿌려졌다”

고은 시인은 89년 남북작가회담이 좌절됐지만 '통일의 씨는 뿌려진 것'으로 평가했다.
고은 시인은 89년 남북작가회담이 좌절됐지만 "통일의 씨는 뿌려진 것"으로 평가했다.
□ 통일뉴스 : 이번 남북민족작가대회가 있기까지 1945년 광복후 두차례에 걸쳐 남북 작가들의 만남이 시도됐습니다. 먼저 1945년 ‘전국문학인대회’가 좌절되었고 1889년 판문점에서의 ‘남북작가회담’역시 무산되었습니다. 멀게는 60년, 가깝게는 16년만에 드디어 남북 작가들의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 소감이 어떠신지.

■ 고은 : 이 회담을 성사시키는 것은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친구들과 또 이 일에 진지하게 헌신하는 후배들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감회는 특별히 없다. 다만 내가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특별강연을 통해서 남북작가회담을 최초로 제안했는데 그 당시 정책으론 이런 제안 자체가 대단히 시련을 받을 만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 제안은 지워질 수 없는 것이었고 분명히 씨가 뿌려졌다고 생각한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민족문학작가대회는 그간 남북 문인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첫걸음이었던 89년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의 추진배경과 진행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 나는 우리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살림을 맡으면서 이 일을 꾸준히 토론하고 해서 이 회담을 공식화하기를 합의 봤다. 그 과정은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일본의 유수한 지식인들의 바람이 이뤄낸 것이다. 그래서 대단히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판문점에서 작가회담을 열기로 양쪽이 합의를 했다. 그러나 판문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국의 국방부나 육군뿐만 아니라 미군당국과도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판문점의 현실성을 고려해서 정부와도 꾸준히 접촉을 하며 회담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정부는 그 회담을 진행하지 말라는 통보를 전날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강행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작가회담 대표 5인이 판문점을 향해 갔다. 우리를 지지하는 동료작가들과 그 당시 재야 지도층 이런 사람들이 함께 여러 대의 버스를 타고 판문점을 향했는데 도중에 다섯명이 전원 연행돼 붙잡혀 있다가 몇 일 뒤 풀려났다.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자가 돼서 감옥에 가서 재판을 받고 나와 1990년대 중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면이 된 상태로 있었다.

89년 작가회담이 무산된 뒤 남과 북에서는 각각 어떤 노력을 해왔습니까?

■ 일단 한번 뿌린 씨앗이기 때문에 이를 가꿔야겠다는 절실한 생각을 가지고 추진을 해왔고 또, 민족문학작가회의에 통일위원회를 두어 전 회장이나 전 이사장들이 이를 맡아왔는데 때마침 2년 전부터 내가 다시 통일위원회를 맡았다. 그 전에는 회담 준비위원장을 했는데 이번에는 통일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현 집행부와 동료작가들과 함께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북 또한 한번 작가회담을 하기로 한 이상 남측과 똑같이 온 정성을 기울였다. 특히 이번에는 북 작가동맹 간부들이 열정을 다해서 함께 남쪽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았고 우리 역시 북쪽의 정성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여러번 만났다. 김형수 총장이나 정도상 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자기 작업시간을 전부 다 포기하고 이 일을 수십번 비공식, 공식 접촉으로 이뤄냈고 북쪽에서는 작가동맹 부위원장인 장혜명씨나 이호근 시인들이 열심히 했고 작가동맹 위원장인 김병훈 위원장도 나이가 많은 분인데 이런분도 아주 열심히 이를 추진하는데 많은 힘을 보탰다.
남북공동편찬 ‘통일문학’은 “민족지향 문학을 최우선으로”

□ 이번 작가회담을 통해 남북은 해내외 민족문학인의 공동조직인 ‘6.15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할 것과 협회 기관잡지인 ‘통일문학’을 공동편집하기로 합의했습니다. 6.15민족문학인협회의 구체적인 상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구상을 마무리한 상태지만 미리 얘기할 필요는 없고 성립이 다 끝난 다음에 하나 둘 드러날 것이다.

□ 문학의 경우 기타 예술과는 달리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양측 정부가 기관잡지 ‘통일문학’편찬에 대해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통일문학’을 편집할 계획입니까?

어려움이 없어서는 재미가 없다. 남북이 함께 편찬하는 책이 어떻게 어려움 없이 되겠는가. 오히려 어려움을 먹고 이것이 이뤄지는 것이다. 어려움을 피할 생각을 해서는 안되고 이를 이겨서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여기에는 양쪽이 서로 뭔가 물러설 것은 물러서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은 주장하면서 남북이 함께 이뤄낸 보편적 가치가 이 잡지의 편집방향으로 결집될 것이다.

또, 굳이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의 그늘이 너무 짙게 깔리지 않도록 할 것이다. 왜냐면 이데올로기보단 민족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을 지향하는 문학을 여기에 최우선으로 담아낼 것이다.


□ 편집위원은 어떻게 구성됩니까?
■ 남북 적당한 인원수로 똑같이 구성한다.

□ 통일문학 편찬 예상시기는 언제입니까?
■6.15민족문학인협회가 결성된 다음에 될 사업이다.

□ 6.15민족문학인협회는 언제 결성됩니까?
■내년에 2차 작가대회를 서울에서 하는데 아마 이때 민족문학인 협회 창립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이 나올 것이다.

통일문학 편찬이 남북 문학과 언어에 미칠 영향은?

■ 우리는 오랜 공통성을 가지고 있고 몇 천년을 하나의 언어를 갖고 살아왔다. 분단 60년은 정말 짧은 기간이다. 커다란 공통성 앞에서 작은 이질성은 자연스럽게 소화될 것이고 앞으로 미래에 이 하나의 언어로 갈 것인데 이미 공통성은 확보된 것이기 때문에 서로 깨달으면 되는 것이고 이 이질이 조금씩 있어야 다양한 문학의 얼굴이 완성되는 것이다. 문학사를 조금씩 하나씩 앞으로 진전시키면 된다.

□ 민족문학작가대회를 통해 제정된 ‘통일문학상’에 어울리는 작품은?

■ 우리 민족의 혼이 담겨 있거나 우리 민족의 역사발전을 내건 탁월한 형상 등. 여기에는 주제만 고집하지 않고 예술성에만 떨어지지 않고 두 가지를 다 완성하는 그런 문학적 성과가 대상이 될 것이다.
백두산에서 맞은 새벽 “일월이 우릴 함께 비췄다”

7월 23일 백두산에서 연 '민족문학의 새벽'에 대해 시인은 '일월이 우릴 함께 비췄다'고 표현했다.
7월 23일 백두산에서 연 '민족문학의 새벽'에 대해 시인은 "일월이 우릴 함께 비췄다"고 표현했다.
□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백두산 천지에서 열린 ‘민족문학의 새벽’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때 고은 시인께서 장문의 시를 읊었는데, ‘민족문학의 새벽’행사를 진행할 때 상황과 심정을 말씀해주십시오.

■ 본래 백두산 등반은 미리 합의된 것이다. 서로 민감한 것이기 때문에 양쪽에서 작품을 미리 사전에 봐서 한 것이다. 나는 89년에 쓴 백두산 서시라는 시가 있는데 한겨레에서 일본 사진작가를 통해 백두산 사진전을 했는데 그 백두산 사진 집에 앞에 쓴 시다. 그 일부만 발췌해 읽기로 했는데, 현장에 가니까 과거에 백두산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쓴 시, 상상 속에서 쓴 이 시를 읽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내 가슴이 뜨겁게 움직여서 쓰는 시가 더 좋겠다 해서 남쪽이나 북쪽의 친구들에게 이를 통보했다. 여기서 쓴 시로 하겠다 해서 바로 이 것을 새로 읽게 됐다.

그 때 새벽 2시에 백두산 밑에 숙소에서 출발해 새벽 3시, 4시가 가까울 때 정상에 올라갔다. 그 전날까지 비가 참 많이 왔는데 우리가 올라가자마자 해가 뜨고 티끌하나 없는 천지가 드러나 있고 저 쪽에는 달이 아직 지지 않고 있고..해와 달이 함께 떠 있었다. 일월이 우리를 함께 비추었다.

밑에 천지는 안개자락 하나 없이 투명한 전체의 모습으로 우리를 떠받쳐 주었고 이런 풍경의 절정에서 남북이 한데 어우러지는 잔치가 됐다. 자연도 우리에게 큰 축복을 준 건데 거기서 우리도 감격적인 시간을 갖고 내가 시를 써서 먼저 읽으니 북의 작가도 화답하고 남의 시인이 읽으면 북쪽의 시인도 읽고 이렇게 해서 한시간 남짓 아주 압축된 문학축전을 했다. 아마 현대 한국문학사, 분단 60년사, 분단 문학사를 통틀어 그런 황홀한 문학적 사건은 처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사건?

■ 비행기를 타고 직항 항로로 갔는데, 서울 인천공항에서 평양공항까지 직항로로 가면 50분 정도다. 이 비행기 안에서 우리 조국의 국토를 바라보며 전혀 둘로 나눠져 있는 상태가 아닌데 우리가 잠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조국의 산하를 한눈에 바로볼 수 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그렇게도 멀리만 느껴졌던 평양도 이제는 숨 몇번만 쉬면 도착할 수 있는 우리 국토의 한곳이다라는 것을 느꼈고 북도 몇 년전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손님을 받아들였던 것 또한 잊을 수 없다. 백두산 잔치도 잊을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만남은?

■ 예전에 만난 사람 중 한 사람만 세상을 떠났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작가동맹 최영하 위원장이라고, 세상을 떠났더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좋은 작가라고 들었다. 나머지는 다 살아있었다. 현 작가동맹 위원장도 우리 다섯 사람의 맞수중의 하나고 오영재, 남대현도 다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 만났다. 홍석중 선생과도 만났다. 내 시를 듣고 감동을 했다며 껴안고 얼굴도 비비고.. 그 밖에도 이호근 시인, 오영재 시인은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다. 내가 한 두살 위니까 나를 형처럼 알고 나도 동생처럼 대하고 그랬으니까.
남북문학교류 “늦은 만큼 큰 힘이 될 수 있다”

□ 이번 민족문학작가대회가 성사된 것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봅니다. 문학적 입장에서 6.15공동선언을 평가한다면?

■ 6.15선언이 채택되니까 훨씬 더 큰 길이 열렸다. 예전에는 좁은 산길로만 다녔는데 이제는 큰길로 당당하게 갔었고...우리는 이 작가대회나 민족문학인협회 이런 것의 근원은 당연히 6.15의 의미가 크게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정치, 경제, 군사 영역에서는 남북교류와 협력이 이미 진행되었는데, 문학영역은 6.15선언 발표 5년이 지나서야 이뤄졌습니다. 왜 이렇게 늦어졌는지요?

■ 문학은 언어다. 뭔가 분명한 것을 서술하고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늦게 시작한 감이 있지만 늦은 만큼 본격적으로 다른 것들을 추진하는데 큰 힘이 될 수가 있다.

□ 6.15공동선언 이후 북측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고 합니다. 북측 문학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습니까?

북 문학의 변화를 우리가 기대할 필요도 없고 요구할 필요도 없다. 그 쪽이 자기 정체성을 위해 지켜야 할 명분도 있을 것이고,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로부터 요구받는 문학적인 과제도 있을 것이고 그들이 하는 것이지 누가 이렇게 해라 그렇게 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문학에 대한 상대적인 구속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작가대회에서 어느 북측 작가가 ‘문학에서 통일은 됐어’라고 말했다는데..

■ 그건 별 의미가 있겠는가. 흉금을 털어놓고 만난 것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라는 의미고 앞으로 하나의 문학을 위해 지향해야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는 남쪽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말 한 것이다.

□ 이번 작가대회로 분단문학이 통일문학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앞으로 남북 문학은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

■ 나가봐야지, 지금부터 뭘 그런걸 얘기해. 전망은 양쪽의 작가들이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전망이 드러나겠지.

□ 마지막으로 6.15시대 문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은 시인의 고견?

문인의 역할은 이제 자기 문학이 분단 시대의 제한된 문학임을 알고 민족 전체가 함께 만날 수 있는 문학을 해야 한다. 분단 이후의 시대, 다시 말해 통일시대도 문학현실 공간으로서 충분히 채워질 것이다고 얘기할 수 있다.


[통일뉴스] 글. 이현정 기자 / 사진 김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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