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일에 발표된 친일파 3090명

평화뉴스
  • 입력 2005.08.30 09: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 발표
...언론.교육계 수장 대거 포함

29일 오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친일인사 309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29일 오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친일인사 309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경술 국치일(8.29)을 맞아, 1945년 8월 이전까지 친일행위를 한 정치, 법조, 군사, 친일단체, 기독교, 천도교, 불교, 천주교, 유교, 언론, 교육.학술, 문학, 음악, 미술, 공연예술계 인사와 전쟁협력자의 명단이 발표됐다.

박정희, 방응모, 김성수, 홍진기, 백낙준, 김활란, 유진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 위원장 윤경로)와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는 '경술국치일'인 29일, 오전 10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 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1차 보고회'를 갖고 독립군을 토벌한 일본군장교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방응모, 김성수, 홍진기 등 조선.동아.중앙일보 전 사장, 백낙준, 김활란, 유진오 등 사립대학교 총장이 포함된 친일인사 3090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1차 명단에는 을사늑약(1905), 한일합병조약(1910) 체결을 주도하며 매국행위를 하고 한일합방 공로로 훈 1등 백작의 작위를 받고 후에 후작으로 승급된 중추원 고문 이완용과 일진회를 조직하고 한일합방을 주도한 송병준 등 대표적 친일인사 133명이 포함됐으며 당시 중추원에서 참의이상의 관직을 맡은 관리 326명이 일본제국의회에서 고등문관 이상의 직책을 수행한 1129명과 함께 나란히 올랐다.

특히 친일관료 출신에는 역대 장관과 시도지사들도 대거 포함돼 있어 우리 사회가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해 얼마나 둔감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시대 화순군수였던 현석호는 해방 뒤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홍천과 청주 세무서장을 했던 인태식은 재무부 장관을, 진도군수였던 김영선은 내무부장관과 통일원 장관을, 조선총독부 광공국 서기관을 지냈던 임문환은 농림부 장관을, 개성부윤을 지낸 이해익은 경기도도지사와 농림부 장관을, 광주군수총독부 사회과장인 정예용은 건설부 장관을, 조선총독부 전매국 총무과 사무관이었던 김태동은 보사부 장관을 지냈다.

특히 신태영, 김정렬, 이종찬, 정래혁, 유재흥,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장창국, 임충식, 이응준, 채병덕, 정일권 등은 일본육사 또는 군관학교,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해방 후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합참 의장 등 군 요직을 차지했다.

경찰 및 군 장교는 각각 간부와 위관급 이상으로 추렸으며 고등계 형사는 추가 확인되는 데로 명단에 올릴 예정이다. 단 아무리 직위가 낮더라도 자발적 친일행위자는 명단에 포함시켰다고 편찬위는 밝혔다.

편찬위 박찬승 상임부위원장은 이들 친일 행위자들의 자발성 논란에 대해 "물론 본인의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직책을 맡아 협력했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일축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적시해 "직업 장교로서 자원해 황군에 들어갔다면 이 자체가 바로 친일행위"라고 못 박았다.

영친왕의 경우 군 장교를 했지만 어린나이에 입대했기 때문에 자발적 친일행위라 볼 수 없다 하여 명단에서 제외됐다.

종교계는 교세가 가장 많이 확장됐던 불교계 친일인사가 57명으로 가장 많고 기독교(48명), 천도교(27명), 유교(27명), 천주교(7명)가 뒤를 잇고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정인과, 정춘수, 일본과의 합병을 획책해 불교계의 '이완용'이라 불리는 이희광, 총력연맹 천주교연맹 이사장으로서 징병을 독려한 남상철, 천도교의 최린 등이 주요 인물이다.

문학계에는 친일 관련 글을 3회 이상 발표한 이광수, 김동환, 모윤숙, 최재서, 유진오, 주요한, 노천명 등이 포함됐으며 음악가 홍난파,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등 징병을 미화하는 노래를 작곡한 박시춘, 1937년 애국금차회 활동을 그린 '금차봉납도'를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한 김은호, 역시 친일그림을 그린 김기창 등이 명단에 올랐다.

공연예술계에선 친일단체인 현대극장 대표 유치진과 조선연극협회 회장 이서구, 조선영화협회 회장 안경화 등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친일인사로 지목됐다.

최근 친일논란을 빚고 있는 유치환, 윤해영, 이원수, 마해송 등은 2차 심의에서 본격 검토할 예정이며 음악분야의 조두남, 채규엽, 함화진,이재호 등도 사실확인에 들어간 뒤 2차 심의과정에서 확정키로 했다. 편찬위 측은 내년에 해외 친일인사와 지방 인사를 추가로 심의해 2차 명단을 발표할 계획이다.

"아무리 누르려 해도 친일청산 노력은 계속"

독립지사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기자들에게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독립지사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기자들에게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날 1차 명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계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포함돼 있어 당사자와 후손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 등 반발이 예상되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이에 개의치 않고 사전 편찬을 추진할 계획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은 "민족을 짓밟은 친일세력들이 꼼짝없이 민족을 눌러왔기 때문에 일제가 길들여놓은 그대로 우리는 친일청산을 하려 하지도 않고 60년을 살아왔다"고 개탄하며 "아무리 막강한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을 누르려고 해도 죽은 민족을 똑바른 민족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 튀어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편찬위 윤경로 위원장은 "일시적인 충격이 있더라도 과거에 명백히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은 반드시 기록되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어떤 권력도 영원히 진실을 감옥 속에 가둬둘 수는 없다"는 말로 의지를 확고히 했다. 단, "이번 명단 발표를 후손에 대한 공격수단으로 삼으려는 어떤 형태의 연좌제적 접근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분명히 했다.

윤 위원장은 "친일 인물에 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유족들이나 관련단체들의 압력도 가중되고 있으나 위원회는 외압에 결코 흔들림 없이 소임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다하겠다"고 밝혀 그간 각계로부터 적지 않은 압력을 받아왔음을 시사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편찬위를 상대로 명예훼손 등 법적인 대응을 하는 것 보다 반박 자료가 있다면 이를 편찬위에 제공해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편찬위는 모든 고소행위에 대응하는 한편 친일인사 명단을 계속 추가시켜 친일인명사전을 완성할 계획이다.

한편, 천도교계 NGO인 (사)동학민족통일회(대표의장 박남수) 등은 이날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에 최린 등 천도교 인사 27명이 포함된 것과 관련해, '나를 광화문 네 거리에서 처형해 매국의 교훈으로 삼아달라'고 한 최린의 말을 인용해 "그 심정이 바로 오늘 천도교인의 심정이다"고 참회했다.

글. 통일뉴스 이현정 기자 / 사진. 통일뉴스 김규종 기자

(이 기사는, 2005년 8월 29일 게재했지만 시스템 오류로 지워져 8월 30일 다시 올립니다 - 평화뉴스)



[참고 자료] - 한겨레신문(8.30)

돌팔매’ 맞기도 전에 ‘친미 꼭두각시’ 변신
미군정 “미국 위해서도…” 식민경찰 중용 / 독립운동가 탄압 고등계 ‘반공투사’ 로 호사


[경찰·군인] 갑자기 찾아온 해방에 가장 먼저 숨을 곳을 찾은 세력은 일제 치하 한국인 경찰들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체포와 고문, 동족에 대한 핍박으로 어느 집단보다 큰 원성의 대상이던 친일경찰은 성난 민중들의 표적이 돼, 충북에서는 3명이 맞아죽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악몽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군정은 곧 일제 경찰조직을 부활시켜 식민지 경찰간부들을 중용했다. 당시 미군정 경찰 책임자는 “그들이 과거에 일제를 위해 일을 잘 했다면 우리 미국을 위해서도 잘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선적인 청산 대상이 된 인물들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고등계 경찰들로, 평안북도 경찰부 주임과 고등과장 등을 지낸 김덕기, 평안남도 보안과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으로 이름난 노덕술 등이다. 김덕기는 의열단의 폭파계획 적발, 독립운동가 오동진 체포 등을 수행했는데 그의 손을 거친 사상범이 1천명에 이를 정도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한국전쟁 직전 풀려났다.

반민특위 간부 암살을 모의한 혐의를 받기도 한 노덕술은 반민특위에 체포됐는데 이승만이 직접 그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이듬해 헌병 장교로 ‘복귀’했다.

또 강우규 지사를 체포한 김태석, 1949년 헌병사령관으로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비호한 전봉덕, 경남·부산지역의 하판락 등도 고등계 경찰 출신이다. 전봉덕은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대한변호사협회 회장까지 지낸다. 초산경찰서장과 만주국 행정참사관을 지낸 홍순봉은 1948년 4·3사건 때 제주도경찰국장으로 토벌을 지휘했고, 6대 치안국장에 올랐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힘을 보탠 일본군 내지 그 꼭두각시인 만주국군 출신들도 한국군에서 상당수가 승승장구했다. 미군정은 일본군의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들을 선호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946년 1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일본군, 만주국군, 광복군, 중국군 출신들이 참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출신들이 대세를 장악한다. 다만, 일본군에서 가장 고위직(중장)에 오른 한국인인 홍사익은 도쿄전범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해졌다.

일본군 및 만주국군 출신으로는 신태영, 김정렬, 이종찬, 현석호, 정래혁, 임충식, 유재흥이 국방부장관,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장창국이 합참의장, 이응준, 채병덕이 육군참모총장, 김창규, 장성환, 박원석이 공군참모총장에까지 올랐다.

만주국군 중위 출신으로 국군에 참여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9년 남로당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일본군 대좌 출신의 이응준이 형집행 정지를 내려 그를 풀어주는 인연도 맺는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인 총망라

[문화·예술] “청산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독일 나치에 부역한 문화예술인에 대한 철저한 청산을 역설했다. 양심과 지식의 권위를 빌려 일반 대중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에 걸맞는 엄중한 책임을 요구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수록 예정자 명단에는 문학·음악·미술·공연예술 분야에서 친일 활동을 벌인 인사 140여명이 포함됐다. 높은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한 문화예술인들이 일제의 집중적인 ‘회유와 강압’ 대상에 오른 데서 ‘친일 부역’이 시작됐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적극적인 친일 행위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학인들이 대표적이다. 한국 최초 현대장편소설 <무정>의 이광수, 한국 최초 서사시 <국경의 밤>의 김동환, 한국 최초 자유시 <불놀이>의 주요한, 일제 강점기 대표적 여성문인 모윤숙,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유진오,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린 시인 서정주 등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1930년대를 고비로 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과 연설을 통해 적극적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에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유력 매체의 기자 또는 간부로 재직하거나 지속적인 문필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영향력과 명망을 유지했다. 광복 이후에는 반공 투사로 변신해 정치적 입신에 성공한 경우도 많다. 유진오는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을 역임했고, 모윤숙은 단정수립에 적극 가담했으며, 주요한은 상공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음악·미술·공연예술 분야에서는 유치진, 홍난파, 현제명, 김경승, 김기창 등 친일 행적이 비교적 알려졌던 인물 외에도 남한 출신으로 월북해 인민배우 호칭까지 받은 문예봉, <애수의 소야곡>으로 유명한 가수 남인수 등이 포함돼 눈길을 끈다. 이들은 각각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공연활동을 펼쳐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게 됐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일제군수가 도지사로 장관으로 출세

[관료] 군수, 총독부 관리 등 친일관료들은 광복 이후 도지사, 장관 등 일제 강점 당시보다 높은 직위에 오르면서 지배층 형성에 있어 광복의 의미는 실종됐다.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해 화순군수를 역임한 현석호는 1960년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일제시대 홍천과 청주 세무서장을 지낸 인태식은 1956년 재무부장관에까지 올랐고,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출신으로 진도군수를 역임했던 김영선은 재무부와 통일원 장관, 주일대사 등을 거쳤다. 이승만 정권 때 농림부장관을 지낸 임문환은 일제 때 용인군수와 조선총독부 광공국 민정관 등으로 일했고, 경기도지사와 농림부장관을 지낸 이해익은 일본 고등문관 관리와 개성부윤 출신이다.

일제시대 광주군수와 총독부 사회과장을 지낸 전예용은 한국은행 총재와 건설부장관 등에까지 올랐다. 무주·고창군수를 지냈던 김태동은 박정희 정권 때 보사부장관을,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출신으로 함경북도 농상부장 등을 지낸 홍헌표는 체신부장관과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냈다. 김창영 초대 서울시장은 일제 때 전북 금산군수와 전남 광공부장으로 일했던 인물이고, 58년 이후 충남도지사와 충북도지사를 지낸 김학응은 일제시대 보은군수 출신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 적극 가담한 매국노들은 일제 강점 뒤 작위를 부여받는 등 친일의 대가로 영화를 누렸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은 ‘을사오적’으로 유명하다. 또 이완용과 송병준은 이병무, 이재곤, 임선준, 조중웅, 고영희와 함께 ‘정미7적’으로 꼽히고 한일합병을 주도한 이완용, 고영희, 박제순, 조중웅, 이병무, 윤덕영, 민병석, 조민희는 경술국적으로 일컬어진다.

고종의 사촌형으로 을사조약 감사 사절단에 포함된 이재완, 장헌세자의 현손인 이재각 등 왕실 종친들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됐다.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일제가 구한말 유력자를 무마하기 위해 창설한 중추원 관리와 제국의회 의원들도 친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중추원 참의를 지낸 고원훈은 전북지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을 지냈고, 박영효는 1910년 작위를 받고 중추원 부의장까지 올랐다. ?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

연대·고대·이대 총장 전쟁찬양 최전선

[교육계] 일제가 식민사관을 뿌리내리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찬위원회(이후 조선사편수회)에는 해방 뒤 국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던 이병도는 물론, 신석호 등 주류 사학자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었다. 이병도는 해방 뒤 서울대 교수, 문교부장관, 학술원 회장 등 교육·학술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완용, 박영효 등 친일파의 거두들이 고문으로 있던 조선사편수회에는 편수위원으로 최남선, 이능화가 참여했다.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은 일제의 대동아 구상을 찬양하는 한편, 교회 신도들을 대상으로 전쟁에 쓰일 애국기 헌납 운동을 벌였다. 창씨개명까지 했던 이화여대 전 총장 김활란도 친일 어용단체였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활동했고, 1942년에는 ‘징병제와 우리의 각오’라는 글을 발표해 일제의 강제 징병을 옹호했다. 고려대 전 총장 유진오는 ‘최후의 돌격’을 촉구하며 전쟁 동원의 앞줄에 섰다. 그는 해방 뒤 제헌헌법의 기초를 만들고 초대 법제처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는 연희전문 부교장을 지낸 유억겸과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자 보성전문 교수였던 장덕수, 중앙여중고 설립자 황신덕 등도 참여했다. 황신덕은 70년대 3·1여성동지회 임원을 맡기도 했다. 여대 설립을 주도한 대표적인 여성들인 이숙종(성신여대), 송금선(덕성여대), 배상명(상명여대·현 상명대), 고황경(서울여대) 등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애국자녀단, 여성단체연합회,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등에서 활동했다. 조선총독부 시학관(현재의 장학사)을 지낸 고광만은 63년 문교부장관에 이어 부산대 총장을 지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


78년까지 대법원장 1명외 모두 포함


[법조계] 일제 때 판·검사를 지내고 해방 뒤 법조계의 ‘주요 자리’를 꿰찬 대표적인 인물은 박정희 정권 때 5~6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씨다. 일제 때 경성지법 판사였던 그는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을 두루 거쳐 대법원장이 됐고, ‘사법살인’으로 꼽히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다.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은 것으로 최근 드러난 조용순(2대), 조진만(3·4대) 전 대법원장도 친일명단에 올랐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빼고는 1978년까지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친일인사가 채웠던 셈이다. 역대 대법관 10명도 친일인사로 분류됐다.

법무부와 검찰도 비슷했다. 일본재판소 서기였던 이우익은 3대, 일제 때 고검 검사였던 이호는 8·20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승만 대통령 때 법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는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 생활을 했다. 그는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의 아버지다. 검찰총장으로는 2대 김익진, 6대 정순석, 10대 정창운이 판·검사 생활을 하며 일제의 ‘지침’에 순응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대한변협 회장으로 있으면서 한-일 협정 반대 등 ‘소신 행보’를 보였지만 일제 때 판·검사를 지내 ‘부일협력자’로 분류된 고재호 전 대법관의 사위는 최종영 현 대법원장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분야별 주요 인물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행적-

◇수작자

▲이완용 = 1905년 을사조약 시 내각총리대신, 1910년 한일합방 공로로 훈1등 백작, 1921년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1920년 후작 승급

▲송병준 = 일진회 조직, 1910년 훈1등 자작과 매국공채 10만원, 아들 종헌 습작. 중추원 고문, 경기도 참사 1920년 백작으로 승급, 사위 구연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

▲조중응 = 명성황후시해 가담. 고종 퇴위 강요. 1909년 친일지 `법정신문' 발간, 1910-1919년 중추원고문, 1916년 대정친목회 및 한성부민회 회장 일훈1등 대욱장

◇제국의회

▲박영효 = 1910년 후작, 1911년 조선귀족회장, 1921년 조선인산업대회 회장, 1939년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편수회 고문 정2위 훈1등 훈장

◇친일관료 출신 역대장관

▲현석호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화순군수, 해방 후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김영선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진도군수, 해방 후 내무부 장관, 통일원장관, 주일대사

▲임문환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용인군수, 조선총독부 식산국 사무관, 조선총독부 광공국 서기관ㆍ민정관, 해방 후 농림부 장관

▲이해익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개성부윤, 해방 후 경기도지사, 농림부 장관

▲전예용 = 일본고등문관 행정과, 광주군수, 총독부 사회과장, 황해 산업부 농업과장. 해방 후 한국은행 총재, 부흥부 장관, 건설부 장관

▲김태동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무주군수, 고창군수, 조선총독부 전 매국 총무과 사무관, 해방 후 보건사회부 장관

▲홍헌표 =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강서군수, 평남도 이사관, 함북도 사무관, 조선금융조합 연합회 함북지부 감리관, 함북 농상부장, 해방 후 체신부 장관, 성균관대 부총장

▲김홍식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행정과, 양덕군수, 경기부천군수, 해방 후 충남도시자, 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군장교

▲신태영 = 일본육사, 일본군 장교, 해방 후 국방부장관

▲김정렬 = 일본육사, 전투기 비행중장, 해방 후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이종찬 = 일본육사, 일본군 장교,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유재흥 = 일본육사, 일본군 장교, 해방 후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대통령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정일권 = 일본육사, 만주군 헌병대위,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총리, 외무부장관

▲임충식 = 지원병, 일본군 장교, 간도특설대, 해방 후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차장, 합참의장

▲백선엽 = 만주 봉천군관학교, 간도특설대, 해방 후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판검사

▲민복기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 판사, 해방 후 대검찰총장, 대법원 판사, 법무부장관, 대법원장

▲홍진기 = 경성지법 사법관시보, 전주지법 판사, 해방 후 법무부 장관, 내무부장관

▲이 호 =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 경성지법ㆍ고검 검사 해방 후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주일대사

▲김익진 = 충주ㆍ강원ㆍ평양ㆍ함흥지법 판사, 평양복심법원 판사, 해방 후 대법관, 검찰청장

◇종교

▲박희도 = 친일잡지 동양지광사 사장,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참사, 배영동지회 평의원, 시중회 발기인

▲정인과(ㆍ창씨명 ) = 1925년 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결성. 1941년 국밂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9년 반민특위 체포.

▲이회광 = 불교계 `이완용', 1912년 조선선교양종각본산 주지회의원 원장, 1915년 불교진흥회 조직, 1919년 일본 임제종과 합병 획책

▲권상로(ㆍ창씨명 ) = 1937년 ‘선각자로서’라는 시국강연, 1940년 국밂력연맹 참사, 1943년 `임정의 조선불교' 간행, 해방후 불교대학 학장, 1962년 문화훈장 서훈

▲노기남 =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 이사, 1940년 국밂력 경성교구연맹 이사장, 1943년 전선종교단체협의회 천주교회 대표위원, 해방후 이승만을 도와 단정 수립

▲최 린(ㆍ창씨명 ) : 33인의 한사람으로써 변절, 천도교를 분열시켜 자치운동 도모, 1934년 중추원 칙임참의, 1937년 매일신보 사장 취임, 1940년 국밂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1949 년 반민특위에 체포, 한국전쟁때 납북

◇문학계

▲이광수(ㆍ창씨명 ) = 1922년 민족개조론 발표,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 1942년 대동아문학자뉨 참석, 수많은 `친일 글'을 남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

▲김동환(ㆍ창씨명 ) = 1929년 월간 삼천리 창간, 1941년 지원병보급 혈전대강연회 연사로 참석, 1941년 임정뇰협의회 발족 주도, `권군천명' 이라는 전쟁독려 시 씀(1943.11.6),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공민권 정지 처벌받음

▲모윤숙 = 1940년 조선문인협회 문예대강연회에서 친일 강연, 1941년 조선교화단체 연합회 간부, 1942년 조선임으국단 부인대 간사, 광복후 단정 수립에 큰 공을 세웠고 예술원상, 국문훈장 모란장, 삼일문화상 수여

▲최재서(ㆍ창씨명 ) = 1941년 친일잡지`국민문학' 주간,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받들어 모시는 문학' 등의 글에서 천황숭배를 주장

▲유진오 = 1939년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1941년 총력연맹 문화부위원 1942∼1943년 대동아문학자뉨조선대표,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평위원, 광복 후 제헌국회헌법 기초위원, 고려대 총장.

▲주요한(ㆍ창씨명 ) = 1934년 조선일보 전무이사, 1937년 흥사단사건시 전향성명 발표,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광복 후 민주당 민의원, 4ㆍ19후 부흥부, 상공부 장관을 지냈고 1979년 사망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음악계

▲이종태(ㆍ창씨명 ) = 1937년 매일신보 주최 `애국가요의 밤'에서 `총후' 작곡, 북지위문단원으로 활약, 후생악단 전무이사

▲현제명 = 1937년 조선문예회 회원,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 1944년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조선음악협회 이사, 광복 후 미군정장관을 명예회장으로 한 고려교향악단 창설, 서울대 예술학부 음악학부장

▲홍난파(ㆍ창씨명 ) = 1939년 홍난파 지휘로 애국가곡집 공연이 방송됨, 1940년 국밂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지나사변과 음악'에서 성전 독려, 1941년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박시춘 = 1943년 `조선지원병 실시 기념음반' 중에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목단강 편지'를 작곡

▲남인수 = 조선군 보도국 제작 `그대와 나'(내선일체 주제가)와 `혈서 지원' ,`이천오백만 감격' 등 친일 노래를 부름

▲김기수(ㆍ창씨명 ) = 1940년 11월 9일 일본기원 2천600년을 기념하는 봉축연회에서 이왕직 아악부가 연주한 `' 작곡, 이 곡은 이능화의 1939년 한문시에 곡을 붙여 일본기원 2천600년 기념 공모 당선작, 국내 최초로 오선보로 작곡된 국악 창작

◇미술계

▲김경승 = 1939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졸업,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전람회에서 `여명' `제4반' 입선, 광복 후 충무공 이순신상(1953), 안중근상(1959) 등 조각

▲김은호(ㆍ창씨명 ) = 1937년 이후 선전 참여작가. 1941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 1937년 애국금차회 활동을 그린 `금차봉납도'를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

▲김기창 = 1940년 `선전' 추천작가,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 추천작가, 1943년 매일신보의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와 1944년작 `총후병사'는 화필보국의 증거

▲이상범 = 1942∼1944년 반도총후미술전 일본화부 심사위원, 1944년 모던일본사가 친일작가를 위해 제정한 제5회 조선예술상 수상, 1940년 조선남화연맹전, 애국백인일수 전람회 등 국방헌금 마련 미술전에 빠짐없이 참여, 광복 후 홍익대 미대 교수, 문화훈장 대통령상(1962), 삼일문화상(1963) 수상


◇공연예술

▲유치진 = 1941년 친잔체 현대극장 대표, 1942년 이용구를 찬양한 장막희곡 `북진대' 발표, `원칙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조광 1941.6) 기고

▲이서구(창씨명 ㆍ 필명 이고범ㆍ남궁춘) = 조선연극협회 회장, 1941년 근로문화인부대, 1941년 9월 1원 채권 봉사대, 1945년 8월3일 문인보국회 극문학부회장

▲문예봉(ㆍ창씨명 ) = `군용열차', `지원병', `집 없는 천사' 등에서 주연 여배우로 출연,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연기과 사원

◇교육학술

▲백낙준 = 1941년 미영타도 좌담회 참석,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활동, 1944년 경성대학 법문학 부장, 1951년 문교부 장관, 1957년 연세대 초대 총장

▲김활란(ㆍ창씨명 ) =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2년 `징병제와 우리의 각오'(신시대 1942.12), 광복 후 이화여대 총장

▲최남선 = 1928년 조선사편섯 위원, 1938년 충추원 쪄, 1938년 만주 만몽일보 고문, 1939년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1949년 반민특위 체포, 1950년 서울시편찬위원회 고문

◇언론계

▲서춘(ㆍ창씨명 ) = 1933∼1937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겸 주필, 1938년 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총력연맹 위원, 1940년 매일신보 주필, 친일잡지 `태양' 창간, 2ㆍ8독립선언 유공자로 있다가 1996년 서훈 박탈

▲김환 = 국민신보(일진회 기관지) 기자, 이등박문 장례식 참가, 1910년대 매일신보 주임, 시사신문(국민협회 기관지) 편집주임, 시사평론, 민중신문(1930) 주필, 국민협회 간부.

▲이창수 = 매일신보 통신부장(1938∼1941), 조사부장(1942), 논설위원(1943), 언론보국회 평의원. `이 시련을 극복하라'(조광 1944년 8월호), 1의 '(조광 1942년 2월)

◇쟁협력

▲방응모 = 1933년 조선일보 사장, 1935년 조광 창간, 1937년 애국금차회 활동, 1938년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서 활동,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3 출진학도 격려대회 주최

▲김성수 = 1920년 동아일보 설립,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부, 1943년 보성전문학교 교장 자격으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등 친일논설 개제, 징병제 찬양, 학병권유제 적극 나섬. 1946년 보성전문학교를 고려대로 개명

▲김연수 = 1924년 삼양사 설립, 1939년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 중추원 쪄

▲박흥식 =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및 배영동존 상담역,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4년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 1945년 대화동맹 심의원
(자료 인용 : 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