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할매의 담배가게...”

평화뉴스
  • 입력 2005.09.16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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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은정...
“공기놀이에 과자 먹던 담배가게 골방...화려함에 밀려 사라져가는 추억의 그림”


기억의 창을 열고 펼쳐보는 잃어버린 고향.
때문에 더없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추억의 그림...

할머니의 엄마, 그러니까 촌수로 따지자면 외증조모님이 사는 곳이 바로 의성 안계였다. 우리는 '외증조모님'을 사투리식으로 줄여 '진이할매'라 불렀다.

진이할매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혼자 그곳에 사셨고 코딱지만한 담배가게를 하셨다. 지금으로 치자면 동네 슈퍼였는데 ‘담배가게’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가게 증손녀들이 오면 동네 사람들이 참 잘 대해줬다.
동네 또래들도 심부름을 핑계로 뻔질나게 담배가게를 들락거렸다. 새까맣게 그을은 동네 아이들과 뒤섞여 들길을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동네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사람이 많이 빠져 숨질 만큼 깊었다.
물에 빠져 죽은 귀신이 어린애들을 잡아간다는 이야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는 고무신 가득히 송사리도 잡고 멱 감고 놀았다.

물놀이에 지치면 잠자리를 쫓아다니거나 들꽃을 꺾거나 맨들맨들한 돌멩이를 주워 공기놀이를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코딱지만한 담배가게 골방이 우리차지가 되었다. 가게 골방은 창고 구실을 했는데, 우리는 빨갛고 노란 눈깔사탕이나 라면처럼 꼬부라진 뽀빠이 과자를 마음껏 먹었다.

어떤 날은 마을 잔치가 벌어져서 돼지를 잡았다.
돼지 잡는 걸 처음 본 나는 지금도 돼지 멱에서 샘처럼 흘러내리던 새빨간 핏빛을 잊을 수가 없다.
집집마다 돼지고기 돌리는 심부름은 아이들이 도맡았다. 담배가게에는 더 푸짐한 돼지고기가 배달됐고 진이할매가 돼지수육을 만들어 주셨지만, 꽥꽥대며 울부짖던 돼지의 비명이 생각나서 차마 먹질 못했다.

대구로 돌아올 때에는 꼭 마당에 도라지꽃을 심곤 했다.
도라지꽃이 우리를 대신해서 진이할매의 외로움을 달래주었으면 했다.

대구로 가는 시외버스가 동네어귀를 떠날 때면, 진이할매는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버스 꽁무니를 뒤따라왔다.
길가 흙먼지를 다 마시며 울면서 손을 흔드는 진이할매를 보고 할매도 울고 우리도 울었다.
진이할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제일 먼저 도라지꽃을 생각했다.

동네 어른들 놀이터이자 마을 소식통이기도 했던 진이할매 담배가게.
이제는 대형할인마트가 곳곳에 늘어나서 지역 큰 시장조차 죽어간다. 추석 제사상도 구닥다리 재래식 시장보다 알록달록 포장된 대형할인매장에서 본다. 명절 장을 보러온 사람들과 상인들이 뒤섞여 재미나게 흥정하는 시장통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형할인매장에 쇼핑가는 것이 여가생활이 되어 버린 요즘.
하물며 동네 구멍가게야 눈 씻고 찾으려 해도 찾아보기 힘들다.
24시간 편의점이 동네 구멍가게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물건들을 한 군데에서 다 살 수 있어서 나도 여러 번 대형할인점에 갔다.
그 때마다 불필요한 물건까지 사게 만드는 상술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공기가 너무 탁해서 한 시간 이상 있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우리 동네에서 코딱지만한 구멍가게를 발견했을 때, 그 때의 반가움이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는 가게 방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폐기물 딱지를 사는 나에게 쓰레기 버리는 방법까지 상세히 일러 주었다.
이십 년도 넘게 됐을 것 같은 낡은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하드’를 집어 들면서 나는 진이할매 생각을 했다.

큰 것, 편한 것, 화려한 것에 밀려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은정(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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