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북녘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

평화뉴스
  • 입력 2005.10.1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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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수 박제원(75) 할아버지 ‘송환의 꿈’...
“남쪽 20년 북쪽 20년, 교도소 20년 보안관찰 15년...”
“고문으로 강제 전향, 1차 송환 때 못 가...


며칠 전 우리는 너무나 고대했던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강제 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에 대한 2차 송환이 정부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제 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지난 2000년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1차 송환 때 그렇게 가시고 싶었지만, 고문과 폭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쓰여졌던 사상 전향서 때문에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셨던 분들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2차 송환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고 정순택 할아버지의 유해가 북녘으로 송환되고 2차 송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간 후, 우리 사무실로도 반가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바로 우리가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장기수 할아버지 중에 한 분이셨다.


박제원 할아버지.
1969년 5월, 북녘에 부인과 세 딸을 남겨두고 남쪽으로 내려오신 후 그해 9월에 체포되셨다.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89년에 출소할 때까지 꼬박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분이셨다.

1930년 1월 20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는 1946년부터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며 야간학교에서 공부를 하셨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함께 공부하던 친구의 고향인 개성으로 가시게 되었다. 개성에서 며칠 머물다 인민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후퇴를 하셨다가 1950년 12월에는 중국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젊은 사람들만 모아 인민군 기술학교에서 교육을 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그 기술학교에서 생활하시며 3년 정도 중국에서 생활하셨다.
“영천에서 태어나 6.25때 북으로...’69년 다시 남으로...’89년까지 20년 옥살이, 그리고 보안관찰 15년...”

1953년 북으로 다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인민군 기계화부대에 계시다가 1956년 제대 후 황해도의 제철소에서 근무하셨다. 그 곳에서 부인인 김명숙 씨를 만나 1959년 결혼을 하셨고 박경자, 박경애, 박경여 등 세 명의 딸을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셨다.

그 후 황해도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셨고, 1964년부터는 중앙당 소속으로 활동하셨다고 한다.
중앙당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집에 자주 오시지 못했다던 선생님은 딸들이 자신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할 거라시며 안타까워하셨다.

할아버지는 1969년 5월, 송병록씨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함께 내려오신 송병록씨는 고향이 김천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친분이 있던 사람의 후배였다고 기억하고 계셨다. 남쪽에 내려와서 만난 사람 중 한 명의 신고로 검거되신 두 분은 1심에서는 사형, 2심에서는 송병록씨는 그대로 사형, 박제원 할아버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송병록씨의 사형 집행은 아이러니하게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겉으로는 남북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장기수들을 사형시켜버리는 정권. 할아버지는 아직도 송병록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셨다.
“고문으로 정신 잃고 병원으로...깨어보니 사상전향서에는 지장이 찍혀 있었다”

대구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하여 대전으로 가셨다가 다시 대구로 오신 후, 대구에서 출소하셨다.
처음 교도소 생활을 시작하고는 2년 정도 다리에는 족쇄를, 팔에는 수정(수갑처럼 손을 묶는 것)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교도소에서 나오는 책을 제외하고는 모든 책을 빼앗아 갔다고 한다. 사상전향서를 쓴 후에서야 겨우 소설책 정도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독방에서 생활하다보니 생각도 둔해지고, 말도 더듬게 되었다시며 눈뜬 장님 신세였다고 한탄하셨다.

할아버지가 전향서를 쓰게 된 것도 고문 때문이었다. 전향전담반에 의한 고문으로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병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이 쓰지도 않은 전향서에는 자신의 지장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1989년, 그 모진 감옥 생활을 끝내고 출소하신 후의 생활 또한 좀 더 넓은 감옥으로 옮긴 것 뿐이었다.
바로 보안관찰 대상자였기에 가족들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직장을 찾아 여러 곳으로 떠돌아 다닌 것도 셀 수 없었다.

출소 후 고향인 영천에 잠시 머물다가 직장을 찾아 다시 대구로 오신 할아버지는 막일은 말할 것도 없고, 과수원일, 수위 등 살기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하지만 간첩으로 교도소 생활을 했던 사람을 직장에서 그대로 두지 않았다. 거기에 자꾸 찾아오는 형사들 때문에 한 직장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직장을 옮겨 다니니까 이사도 자주 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경찰은 직장도 자주 옮기고 이사도 자주 한다는 이유로 보안관찰을 계속해서 연기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기억으로도 5~6번 정도는 더 연기되었다고 한다. 결국 올해 8월 보안관찰이 끝날 때까지 출소 후에도 15년 넘게 감옥살이와 같은 삶을 살아오셨던 것이다.
“월북자 가족에서 빨갱이 가족으로...경찰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 끊은 조카...”

선생님의 고향은 영천으로, 출소하셨을 때 고향에는 형제들과 조카들이 여전히 살고 있었다.
장기수 가족의 삶의 질곡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밤을 세울 수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할아버지의 가족은 남파되기 전까지는 월북자의 가족으로, 남파된 후부터는 빨갱이의 가족으로, 그 모진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지금은 형제들은 다 숨지고, 조카들이 7~8명 정도 살고 있는데 조카들에게 피해가 갈까봐서 연락도 자주 안하신단다.

그 동안 삼촌 때문에 겪었던 숱한 고생을 생각하면 조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하신다.
부모님 제사에 갔다와도 누굴 만났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다 보고해야했기에 제사에도 잘 가지 못했다.

특히 할아버지께서 안타까워 하시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그 하나는 영천에서 농사를 짓던 조카 하나가 본인 때문에 경찰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한 일이었다.
자살하기 두 달 전, 교도소로 접견을 왔었다고 한다. 마지막 접견이라는 말에 직장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저세상으로 간 것이었다. 마음이 좀 강했으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시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농사도 못 짓게 되자 결국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마지막 접견 때 500원짜리 빵을 넣어준 것이 그 조카와의 마지막이라고...

그리고 몇 해 전 조카의 아들이 병으로 죽었는데, 보안관찰 신고를 하는 것 때문에 거기에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삼촌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도 안온 것이 조카로서는 얼마나 야속해할까?’ 하고 할아버지는 생각하셨다.
"맞던 꿈, 철사 줄에 묶여있던 꿈, 재판받던 꿈... 이젠 이 고통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

지난 2000년 1차 송환이 있을 때, 그 소식을 미리 알지 못해 신청조차 하지 못하셨다.
그 당시에도 보안관찰 대상자였기에 마음 놓고 누굴 만날 수 없었고, 1차 송환 후 2차 송환에 대한 기대를 전혀 하지 않고 지내셔서 그 동안도 후원회로 연락을 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유일한 소망은 북녘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5~6년 전부터 함께 사시는 분이 계신데, 송환이 된다면 이분이 혼자 사실 수 있게 해 주고 가야한다는 걱정도 있으셨다.

현재 할아버지는 아파트 수위 일을 하시며 한 달에 60만원 정도의 월급으로 두 분이서 살고 계신다.
그리고 가기 전에 조카들을 만나 지금까지 삼촌이 조카들에게 잘 하지 못했던 일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조카들은 삼촌이 보안관찰 대상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남쪽에서의 삶을 정리하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할아버지는 꼭 송환되길 바라고 계셨다.

“요즘 꿈을 꾸면, 계속 교도소 꿈만 꾼다. 맞던 꿈, 철사 줄에 묶여있던 꿈, 재판받던 꿈... 이젠 이 고통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

‘남쪽에서 20년, 북쪽에서 20년, 교도소에서 20년.’
선생님의 삶의 분기를 나눠 본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감옥에서의 그 모진 세월로 허리와 다리도 불편하고, 당뇨에 고혈압 등으로 건강도 좋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진 후 다시 돌아서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불편한 다리로 조금씩 절뚝거리시면서 걸어가시는 할아버지의 뒷 모습에서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엿볼 수 있었다.
분단이 없었다면 이런 분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 모진 고통도 느끼지 않았을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늦었지만 할아버지의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서 남은 여생은 편안하게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사진 윤보현(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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