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폭격, "예천 산성리는 제2동막골"

평화뉴스
  • 입력 2005.10.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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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평통사], 예천 산성리서 위령제 지내...
"6.25 때 미국 무차별 폭격으로 주민 136명 사상"

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지금은 여느 시골마을과 다름없는 가을 풍경이다.
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지금은 여느 시골마을과 다름없는 가을 풍경이다.

한나 아렌트는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라고 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단어만으로 20세기를 규정짓기에는 20세기는 너무나 잔혹했고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은 억울했다. 인류가 휘두르는 천만가지의 폭력 중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전쟁이라면 전쟁이 낳은 가장 극단적인 폭력은 민간인 학살이다.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산골 사람들이 어느날 맑은 하늘을 가르고 마을 상공을 지나가던 비행기를 쳐다보다가 비행기에서 떨어트린 폭탄과 기관총에 맞아 처참하게 죽어갔다고 한다면 우리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떠올릴 것이다.

영화 동막골에서는 다행히 주인공들의 '영화같은' 활약으로 참사를 막아냈지만 이곳 산성리에서는 실제로 이런 참사가 빚어졌다.

23일 안동평통사 회원 등 안동시민 30여명이 산성리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23일 안동평통사 회원 등 안동시민 30여명이 산성리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안동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회장 김창환) 회원과 안동시민 30여명은 23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를 방문했다.

산성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19일, 미 공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해 69호에 이르던 마을이 초토화되고 사망과 실종 64명을 포함해 136명의 사상자를 낸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픈 '동막골'이다.

안동MBC 강병규 PD
안동MBC 강병규 PD
이날 일행들은 지난 6월 28일 안동MBC에서 방영한 '산성리 폭격의 진실'의 담당자인 강병규PD의 안내로 산성리를 방문해,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 강PD의 취재기를 들은 뒤 위령제를 지내고 고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산성리 폭격의 비극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많이 바뀐 1951년 1월, 미군은 38선 이남에 남아 있던 북한군의 도주로 차단과 빨치산 소탕을 위해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 지대의 전선에 전투력을 집중한다.

미군은 1950년 11월의 중국군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자 화력이 우세한 공중 폭격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이는 북한 지역뿐만 아니라 소백산맥 전선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당시 이 전선을 맡고 있던 10군단 사령관 알몬드(Edward. M. Almond) 장군은 일명 '지구소각작전'의 신봉자로 '적이 없더라도 그들이 은신할 가능성이 있는 마을을 미리 네이팜으로 폭격하여 태우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951년 1월 19일 187공수연대의 요청에 의하여 산성리에 3차례의 공중 폭격이 감행되었고 임산부와 노약자, 어린이가 대다수인 136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2년 미 8군과 5공군의 감찰감이 합동으로 조사해 보고한 '합동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산성리 뒷산인 학가산에 북한군 10사단이 집결한다는 적정보고가 있었고 미군은 소개령을 내린 뒤 마을을 폭격하고 폭격은 '대성공'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작 소개령이 내려진 곳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는 신전리에 내려졌고 네이팜탄은 산성리에 쏟아졌다. 자연지리적 여건이 비슷한 상성리를 신전리로 오인한 오폭이다.

그러나 미국과 산성리를 오가며 이 참사를 취재한 강병규PD의 입장은 다르다. 강PD는 "산성리 사건을 단순한 오폭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강PD는 "당시 미군의 작전은 10군단 사령관 알몬드가 주도한 무차별 조직파괴정책(Methodical Destruction Policy)이었으며 이는 산성리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작동했다. 이는 한반도 내의 인간을 사람으로 보지 않은 미군의 야만적 행각이었다"고 주장했다.

생존자 안희득(오른쪽)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안태기 대책위원장.
생존자 안희득(오른쪽)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안태기 대책위원장.


어린 나이에 이 참사를 겪은 생존자인 마을 주민 안희득(당시 12세)씨.
안씨는 "1차 폭격 후 30분 이내에 마을을 휘감은 화염으로 맑은 하늘에 해가 보이지 않았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장정들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거나 일을 나간 사람이 많았고 주로 집안에서 길쌈을 하던 아낙네들과 마을에서 뛰어놀던 어린 아이들이 폭격을 당해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기관총이 임산부의 배를 관통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허리가 잘려나간 사람도 있었다"는 증언은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주민대책위를 맡고 있는 안태기(58세)씨는 "정찰기가 한차례 마을을 돌았는데 비가 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비가 아니라 마을을 불태우기 위해 뿌린 휘발유였다. 그러고 나서 세 차례 폭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 때는 하루 저녁에 40여 호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바람에 이웃 마을에서는 곡소리가 무서워 이 마을을 출입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안태기 주민대책위원장은 "좌익이 뭔지도 몰랐던 마을을 이렇게 무참하게 박살내고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었으니 명예회복은 물론이고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동안 보도가 나간 뒤 국방부에서 한차례 다녀갔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며 "우리 살아 생전에 (보상이)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며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타했다.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안동시민들.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안동시민들.


우리민족은 20세기를 좌우 이념대립의 최전방에서 가장 극명한 대립과 불신, 전쟁의 광기를 겪으며 살았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지난한 '삐침'의 과정이었으며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상처와 원한으로 남아 있는 치유 불가능한 과거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더한 비극은 21세기가 깊어가도 그 상처를 치유하고 넋을 달래줄 길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세기동안 자신들이 벌린 어떤 전쟁에서도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어떠한 보상도 한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 정부는 아직도 허울뿐인 좌우의 분열을 넘어서지 못하고 연일 색깔론에 목을 매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민간인 학살 문제도, 특별법이 통과되기는 했으나 진상규명은 물론이려니와 명예회복이나 보상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상황이다.

위령제를 지낸 일행들이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는 동안도 고추대궁을 뽑고 메밀단을 추스르는 촌로들의 손길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여기저기서 억울한 원혼들의 곡성이 들리듯 찬바람이 일어 학가산을 맴돌고 있었다.

글.사진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피재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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