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큰 농사꾼 시어머니..."

평화뉴스
  • 입력 2005.11.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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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4] 이은정...
“농사꾼이 떵떵거리고 살 날은 영영 오지 않는 것일까?"

결혼해 만나는 가장 낯설고 어려운 사람은 아마도 시어머니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 어머니는 마흔에 남편을 잃고 혼자 억척같이 농사지어 자식들 키워낸 무서운(?) 경력을 갖고 있다. 대범하고 깐깐하고 일손 재고 경우가 발라서 누구라도 잘못한다 싶으면 바른 소리를 잘 하셔서 동네에서는 “별난 할마시”로 통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친척들이 득시글거리거나 말거나 된통 야단을 맞아 무안함과 무색함에 눈물 찔끔 흘린 일도 몇 번 있었다. “저 들쾡이 같은 거, 쯧쯧쯧... 뭘 할줄 아는 게 있어야지!” 하고 타박을 맞곤 하는데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기도 하지만, 어머니한테 주눅이 들어서 그나마도 더 못하게 된다.

그런데도 가끔 나도 모르게 불쑥 “엄마”소리가 나올 때가 있다.
시어머니가 참 “별난 할마시”이긴 하지만 자식사랑만큼은 정말 끔찍한 분이다.
사랑에 무슨 급수가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 사랑’의 급수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참 어려운 분이지만 존경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 남편은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큰아들이었는데 데모한다고 군대를 안가서 무던히도 어머니 속을 썩였다. 나이 들어 군대에 들어가더니 입대한지 일 년 만에 전투훈련 중 사고를 당했다. 화차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엄지, 검지 한 마디씩이 잘린 것이다.

대전 육군병원으로 어머니와 함께 갔을 때, 군의관을 만나자마자 어머니는 당신 손가락을 잘라서 아들 손에 이식할 수 없냐고 물었다. 손가락이 으스러진 탓에 손쓸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도 어머니는 한동안 당신의 오른손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면서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정미소에서 고춧가루 빻는 걸 보시고 “너거는 절대로 고춧가루 사 먹지 마래이”하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아무리 내다 파는 거라도 사람들이 우째 그래 닦지도 안하고 아무렇게나... 참, 양심도 없지! 그거 다 우리 자식들 입으로 들어 갈낀데...”하며 안타까워하셨다.

아무도 없는 어둑어둑한 들녘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일하는 어머니를 보면 어머니가 참 커 보이기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해서 마음이 짠해진다.

명절 장에 가셔서 노점들 틈에 앉아 집에서 키운 콩나물을 팔고 있는 어머니를 봤을 때, 남편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비가 투둑투둑 떨어지는 시장통에서 살이 하나 빠진 검정우산을 받쳐 들고 있는 어머니 모습에 눈물이 나려했다.

올해도 나는 앉아서 떠먹여 주는 밥 받아먹듯이 어머니가 장만해 주시는 농산물을 받아먹는다. 매일매일 조금씩 거두어 모아야 얻는 녹두며, 열매 거두기 어렵다는 검은 콩, 여름 내내 이고지고 사는 태양초 고춧가루, 가시에 긁혀 가며 끊어다 주시는 고사리, 좁쌀, 팥, 수수, 깨소금, 된장, 고추장, 간장, 참기름, 청국장가루까지. 가을이면 논에 통발을 넣어 잡은 미꾸라지로 추어탕도 해주신다.

어머니 텃밭에는 없는 게 없다. 배추, 무, 파, 상치, 오이, 가지, 들깨... 작은 아들이 하는 부추농사일도 같이 하시면서 언제 그걸 다 하시는지, 어머니 일 량에 그저 놀랄 뿐이다.

쌀까지 내준다고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다.
들녘에 내려앉은 완연한 가을색이 아름다울수록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어머니 같은 농사꾼이 떵떵거리며 대접받고 살날은 영영 오지 않는 것일까.

이은정(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이은정(35)님은,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과 회원소식지 '지빠귀와 장수하늘소'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월간 [작은책]에 '생활 속 환경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지역의 환경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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