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의 도시에서 자전거를 타며...”

평화뉴스
  • 입력 2005.12.10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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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6] 정혜진...
“사람을 위하지 않는 인도, 못 걷고 쫓겨나는 행렬”

2005년 5월, 내 인생이 바뀌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내게 뭔가 대단한 극적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이 들려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장이 과장된 것은 전혀 아니다.

올 5월부터 나는 자가용 의존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출퇴근은 되도록이면 자전거로 한다. 교통수단을 바꾸었다기보다는 다양화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텐데(버스, 지하철, 택시, 그리고 카풀까지 동원하니!), 어쨌든 자전거로 인한 내 생활의 변화는 미처 예상치 못한 변화의 연속이었다.

자가용을 몰다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단순히 이동하는 수단을 바꾸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변화가 잇따랐는데, 그 많은 변화 중 하나는 도시의 풍경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차를 몰고 갈 때 보는 풍경은 차가 밀리냐 안 밀리느냐, 단순한 이분법이다. 주변의 사람과 건물은 늘 거기 그대로 있는, 차도의 주변 세트에 불과하다. 차가 안 밀리면 시원한 풍경이고, 차가 밀리면 답답한 풍경이다.

자전거를 타면 차도와 인도, 사람과 건물, 간판까지 종합적인 풍경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 술 덜 깬 직장인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출근길을 재촉하는 모습도 보이고,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촌스럽고 난잡한 상가의 간판도 보인다. 차를 탈 때 건성건성 지나쳤던 풍경이 하나하나 의미를 갖고 내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

기분 좋은 풍경도 있는 반면에 불합리하다 못해 화를 나게 하는 풍경도 있다.
가장 흔한 불합리한 풍경 가운데 하나가 잘 나가는 식당이 주차장으로 차지하고 있는 인도 풍경이다.
잘 나가는 식당에는 차들이 늘 꾸역꾸역 몰리다 보니 식당 주차장 공간이 모자라고, 그러니 식당과 접한 인도를 곳곳에 손님들 차를 대고 관리한다. 더 이상한 점은 시민들의 공유재인 인도를 사유화하는 파렴치한 식당인데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기는커녕 맛있는 식당으로서의 명성이 더 올라간다는 점이다. 갈 길이 막힌 보행자들은 할 수 없이 차와 차 사이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거나 차도로 밀린다.

우후죽순 들어서는 재개발 아파트 건설 현장들도 불합리한 풍경 가운데 하나다.
산이 보이는 전망을 가로막고 아담한 주택가를 밀어내고 주변과 어울리지도 않게 제멋대로 큰 건물이 들어선다.
그들에게 땅은 나만의 공간이다. 이른바 ‘땅꾼’에게 땅을 판 이들은 자기 땅이니 자기 맘대로 팔고, 땅을 산 업체는 또 자기 땅이니 자기 마음대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건물을 짓는다. 내 땅 내 맘대로 하는데 웬 상관이냐,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당당하게 어깨를 편다.

인도는 물론이고 아파트도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공간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의 삶과 관계를 맺지 않은 나만의 공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공간은 본질적으로 공유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공적인 용도로 쓰이거나 활용되지 못한다. 명백히 공공재인 인도를 사유화하고,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할 아파트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쓰일 뿐이다.

=== "도시는 사회의 공간적 구현체다. 그러므로 도시는 사회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현대의 도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람을 위하지 않는 도시’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위한 도시’다. 전자가 더 많은 이윤을 향한 이기적 경쟁의 논리에 사로잡힌 ‘난민(難民)의 도시’라면, 후자는 공익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아름답고 편안한 구조와 형태를 갖춘 ‘시민의 도시’다"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 홍성태의 서울 만보기』궁리, 2004)

서울토박이가 정의한 서울은 난민의 도시다.
여기서 난민은 하위 계층화된 존재로서 타인을 쉽게 못 믿을 만큼 극단적인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단다. 전쟁난민과 산업난민처럼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있는 도시의 난민들 말이다.

생존경쟁이 서울만큼 치열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나는 ‘난민의 도시’라는 말에 이 도시의 풍경을 연상하며 서글픈 공감을 한다. 조금이라도 더 돈을 더 받기 위해 땅을 팔고 가는 사람들이 이루는 전세 행렬에서, 그 널찍한 인도를 제대로 못 걷고 차도로 밀려 쫓겨나는 사람들의 풍경에서 난민 행렬을 떠올리는 것이 과장만은 아닐 테니….

정혜진(영남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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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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