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밤의 아름다운 전화”

평화뉴스
  • 입력 2006.02.1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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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임(방송작가)..."도움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로렌조오일병'을 앓고 있는 열 살 무현이와 어머니...(사진. TBC [TV좋은 생각]팀 제공)
'로렌조오일병'을 앓고 있는 열 살 무현이와 어머니...(사진. TBC [TV좋은 생각]팀 제공)

1.
수요일 밤 자정.
방송이 끝나고 나면 전화벨이 울린다.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제가 도대체 뭘 하면 되죠?” 울컥 마음이 앞서 전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만 보니 한약을 먹던데, 제 친척 중에 한의사가 있어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는 사람,
“한번에 몫돈은 힘들고 다달이 얼마씩 넣어주고 싶은데, 계좌번호 좀...”
큰돈은 못 부친다고 연신 미안해하며 계좌번호를 받아적는, 역시나 가난하고 아픈 사람까지.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깨어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밤, 나는 괜히 착해진다.


2.
방송을 하다 보면, 이런 저런 문의전화를 많이 받는다.
그중 가장 많은 전화가 “그 식당 어디예요?”다.
어디 맛있는 데 없나... 촉각이 곤두선 사람들은
방금 TV에서 본 그 맛집을 찾기 위해, 114 전화해서 방송국 번호를 묻고,
방송국에 전화해서 방금 나간 프로그램의 담당자를 찾고,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연결하는 그 번잡한 과정을 기꺼이 감수한다.

두 번째 많은 전화가 “그 병원 어디예요?”다.
최근 개발된 건강비법, 최첨단 성형수술법,
이런 저런 질병에 관한 상담방송이 나가고 나면 수화기를 놓기가 무섭다.
전화통에 아주 불이 난다.

그 외 각종 제보전화와 항의전화 등 온갖 전화를 줄줄이 받다가,
‘에라이, 이놈의 전화통!’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때쯤,
드디어 온다.
앞의 전화 속 목소리들이 굉장히 당당하다면(으레 시청자들은 전화번호안내가 방송의 당연한 의무인줄 안다. 그러고는 취재처와 방송국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을 거라고 지레 넘겨짚는다. 때로는 얼마 주면 방송에 나올 수 있냐고 묻기도 한다),
이 경우는 목소리가 아예 기어들어간다.
“어떻게 도와야 되죠? 도대체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3.
그래, 나도 묻고 싶다.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번 주엔 로렌조오일병에 걸린 열 살 무현이다.
부신백질이영양증(일명 로렌조오일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려서,
멀쩡하던 아이가 석 달만에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됐는데,
병원에선 방법이 없다고 퇴원하라 그랬단다.
길어야 2년 남았단다.
얼마나 어이없고 기가 차고 억울했을까?

취재허락을 받으려고 전화를 거니,
답답함을 하소연할 데 없던 어머니는 와락 눈물을 쏟고 만다.
“양방에서는 안 된다고 해서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한약을 먹이고 있는데,
한방치료다 보니 의료보험도 안되고,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난치병어린이 지원도 못 받아요“
그렇게 1년을 살았다.
전세금도 몽땅 날렸고, 다달이 50만원이 넘는 약값에 기저귀값까지 빚만 늘어가는데,
엄마는 병원에서도 다 포기한 일을 단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아이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
1년 만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게 된 것, 2시간이 넘게 걸려도 약 한 사발 무사히 삼키는 것,
싫으면 가만있다 좋으면 소리내 웃는 것으로 제 의사를 표현하는 것...
이 모든 게 엄마에겐 기적이다.
잘한다, 이렇게라도 좋으니 우리 오래오래 살자. 엄마는 말한다.
참으로 고단하고 가난하고 위대한 희망.
그 희망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어서 자꾸만 절박해지고 있었다.

4.
고백컨대, 나는 방송을 보면서 단 한번도 전화를 건 적이 없다.
아니, 있긴 있구나.
가끔 즉석에서 누르면 전화요금으로 자동처리되는 ARS가 일년에 한 몇 번 되겠다.
그러고도 방송작가다.
그러고도 아픈 아이들, 아픈 엄마들 속내를 글로 써보겠다고, 만날 컴퓨터 앞에 앉는다.
돈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김치라도 갖다 주고 싶다, 집 청소나 아이 봐주는 일을 해줄 수 있다며
"그런 것도 되냐"고 조심스레 묻는 가난한 전화를 받을 때면,
나는 심하게 찔린다.
이것저것 물을 필요도 없는 ARS도 아니고,
모르긴 해도 그는 방송 말미에 잠깐 자막으로 띄운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반성하고 원고 쓰고 전화 받고, 또 반성하고 그러면서 나는 오늘도 전화를 기다린다.
참고로 내 전화번호는 053-760-1935다. (무현이 지원전화는 계속 받고 있다)

5. 덧붙이는 말
전화 얘기가 나온 김에, 한번은 이런 전화도 있었다.
“아이가 아픈 건 다 삼신이 노했기 때문이다. 내가 제를 올려줄 테니, 그 어머니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
나름대로 용하다는 무속인이었다.
어째야 할지 난감했지만 ‘그 식당이 어디냐, 그 병원이 어디냐’에 비하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전화인가.
도움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

무현이 후원 계좌 : 222-07-009589-6 대구은행(예금주 박무현)

이은임(대구방송(TBC) 방송작가)
*. 이은임 작가는 TBC [TV좋은 생각](수요일 밤 11시 5분)을 제작하면서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위대함, 결국 세상을 변화 발전시키는 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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