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진규 교수를 추모하며..."

평화뉴스
  • 입력 2006.05.1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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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개혁.교육민주화로 해직과 복직..따뜻한 인문주의자, 그리고 신념의 인간..”

아들 품에 안겨 떠나는 故 김진규 교수...
아들 품에 안겨 떠나는 故 김진규 교수...

김진규(金珍圭) 교수(계명문화대)가 작고했다. 간암 발병으로 3개월여 투병하다가 지난 5월5일 어린이날 오후 7시 30분 경 영남대병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5월 8일 아침 8시에 대구 시민사회교육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영천 은해사에 수목장으로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갔다.

임종하기 직전 가톨릭으로 귀의해 장례는 가톨릭 식으로 치러졌고 최종적인 안식처는 평소 고인이 자주 다니던 은해사 뒤편 소나무 숲에 묻혔다. 가족으로는 미망인과 두 아들이 있다.

신라 향가 가운데 <제망매가>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좋아한다. 한 가지에 나고서도 떨어질 때는 서로 갈 곳을 모른다는 나뭇잎에 비유해 죽음을 설명하는 이 시는 향가 가운데 아마 가장 깊은 미학적, 혹은 사상적 깊이를 가진 시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로 인해 신라시대의 문화는 높은 사유와 불교적 세계관을 누렸던 시대로 기억되기도 한다.

실제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어머니의 같은 배(腹)를 우주의 근원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죽음은 제각기 맞이할 수밖에 없고, 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세간의 말처럼 인간들의 삶과 죽음이 불가사의 해보이기도하고 측량할 수 없이 넓게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또 어떤 때는 죽음이야말로 허망한 그 무엇이라는 실체관을 갖게 해 주기도 한다.

'대구 시민사회교육장'으로 치러진 故 김진규 교수의 영결식...
'대구 시민사회교육장'으로 치러진 故 김진규 교수의 영결식...


이미 그 자신도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김현이 생전에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망자의 모습이 산 자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지기 전까지는 그는 죽은 게 아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육체적 죽음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망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한 적이 있다. 당시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안타까운 마음에는 공감이 갔지만, 누가 뭐래도 죽음은 엄연히 죽음이며 소멸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실존적인 차원에서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지만, 사회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의 죽음은 반드시 소멸이나 사라짐이 아니라 강력한 부활이자 영생이 되기도 한다. 나는 몇 해 전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한 신현직 교수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번 김진규 교수의 죽음에 대해서도 역시 그런 생각이다. 타계하기 직전 고인이 보여주었던 정열적인 모습과 정의로운 자세는 그의 육체적 소멸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우리사회와 역사에 살아남을 게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고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따듯함’ 이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넉넉한 인간이었다. 싱그러운 풋사과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씩 웃는 모습이며, 마치 부잣집 철없는 도련님을 연상시키는 순수함은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음악을 좋아하는 로맨티스트이자 여행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실제로 나에게도 장기간 인도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 한 적도 있다.


"사학개혁과 교육민주화 외치다 해직과 복직...“

지난 2003년 5월에 결성된 <대구경북의 미래를 여는 모임>에 나는 배남효 형의 권유로 이사로 참여하면서 당시 그 단체의 상임대표이던 김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다. 사회개혁에 대한 열정적이던 모습, 겸손함 등이 기억에 남는다. 서로 알게 된 지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지만 교육문제, 언론문제에 대해서 적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의 하나로 <대구경북시민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교편을 잡고 있던 김화식 선생의 3남으로 대구에서 출생해서 경주 등지에서 성장했다. 경북고(1973) 영남대 경제과(1978) 계명대 경영학 박사(1993)를 마치고, 1981년부터 계명문화대 교수로 25년간 봉직하면서 기획실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교수협의회 의장(2003-2005) 한국세무학회회장(2004-2005)를 비롯해 국민참여운동본부 대표(2002-현재) 대구경북의 미래를 여는 모임 상임대표(2003-2004) 대구남부지역새교육시민모임운영위원(2004-) 대구경북대학민주화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표(2005-현재) 대구경북시민신문사이사(2005-현재) 등의 활동을 했다.

국민참여운동본부라든가 현 참여정부에 대한 옹호로 인해 비판자로부터는 ‘노빠’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사학개혁과 교육민주화에 대해서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교육민주화운동으로 인해 2005년 1월에 대학에서 해직되었고, 법정 소송과정을 통해 재단에서 징계철회 결정을 얻어내 복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해직과 복직투쟁 과정에서 받은 고민과 분노가 발병의 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 때문에 주변사람들은 더욱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했다. 해직기간 중에 대구 CBS라디오에서 사학개혁과 관련해서 두 차례 인터뷰를 했고, 평화뉴스 등 인터넷 언론에서 그의 해직을 뉴스로 다루었을 뿐 소위 대구의 주류언론에서는 외면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생전에 주류언론의 횡포라면서 분노했다.

고인은 평소 자주 찾았던 영천 은해사 뒤편 소나무 숲에 안장됐다...
고인은 평소 자주 찾았던 영천 은해사 뒤편 소나무 숲에 안장됐다...


해직기간 중에 인터뷰를 한 『대구사회비평』(2005. 여름호)에서 그는 사학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사학의 자율성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학의 자율성은 사학재단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학교육의 자율성일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학들은 자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사학을 왕국으로 만들어 두고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자율성은 부패에 대한 자율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사학은 우리나라 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학이 바로서지 않고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학법 개정은 사학을 정상화하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늦게 회개한 부르주아’라던, 곧 나으면 많이 돕겠다던 김 교수...”


김 교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조금만 보자.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경주의 시립도서관 이었습니다. 그 당시 경주도서관에서는 윤경렬 씨가 운영하는 ‘향토학교’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매주 일요일 향토학교에서 윤경렬 씨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놀랄만한 강의였습니다. 탑과 가람배치에서부터 간다라불상과 바티칸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강의를 했으니까요. 매주 일요일이 가다려졌지요. 아마 4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도서관에서 매주 3권의 책을 빌려서 읽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때 책 읽는 즐거움을 알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독서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어린이도서관운동을 해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특히 컴퓨터세대에게는 책읽기가 더욱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어야 사고에 깊이가 생기지 않습니까? 요즘처럼 컴퓨터로만 정보를 얻게 되면 사고가 얕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당시 을유와 정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결국 다 읽기는 읽었습니다. 그런데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읽은 책도 많았습니다. 고 1때 파우스트를 읽었습니다.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더군요, 반면에 당시 그렇게 감동을 주었던 데미안은 다시 읽어보니 너무 낭만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에 따라 같은 책도 느낌이 많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더군요. 그러나 젊은 시절의 그 감동은 이제 거의 찾아와 주지를 않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학생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학생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이 글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 교수는 교육민주화에 대해서는 신념의 인간이었지만 본성은 따뜻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인문주의자였다. 한 번은 나에게 “김 시인은 민중시인이지만 시를 읽어보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깊은 것같아요. 단순히 목소리만 높이는 그런 시인은 아닌 것같아요.”라고 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스스로 ‘늦게 회개한 부르주아’라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 뒤늦게 뛰어든 교육민주화운동에 대한 열의와 헌신의 역설적인 표현이었으리라. 초기 <미래모임>의 현대사상강좌에도 매주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여하여 강사와 수강생을 격려하는 배려를 보였다.

작고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나눈 통화에서 “도와야 할텐데 몸이 이래서... 곧 나으면 많이 돕겠다. 김 시인님 잘 안 하시겠나 ”라고 하던 일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것같다. 그리고 하고 싶다던 인도 여행도, 어린이도서관도, 교육개혁, 좋은 언론도 모두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 너무 일찍 가셨다. 가슴 아프고 슬프다. 다시 한 번 삼가 김진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2006.5.10

김용락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아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고 있습니다. 또,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CBS대구방송]의 <라디오 세상읽기>도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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