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들, 그들의 나라"

평화뉴스
  • 입력 2006.05.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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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3 ]...
“개혁의 변죽만 울리려거든 차라리 손대지 않는 게 낫다”

엊그제 대학이 ‘2008년 대입에 학교내신을 50%이상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어제 거의 모든 대중매체들은 이주호라는 한나라당 의원이 공개한 학교간 학력차를 대서특필하면서, 엄연한 학교차를 무시한 채 내신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도대체 국가경쟁력은 안중에도 없는 참여정부의 포퓰리즘에 대해 사설로 기획기사로 폭로하고 나섰다.

‘PISA의 수학시험에 응시한 서울 Q외고 학생 71.8%가 전국 상위 4%안에 들어 있고, 한편 대도시 일반계 Z고에는 전국상위 11%안에 든 학생이 단 한명도 없다.’ 극심한 학교차다. 참으로 걱정스럽다.

단적으로 묻자.
“학교간 학력차가 이지경인데, 그걸 어찌하면 되겠소, 까놓고 말해보소”

모르긴 해도 그들의 속마음은 이런 것일 게다.
‘똑똑한 아이들을 일찍부터 뽑아 서울에 모아 집중 관리한다. 지방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는 똑똑한 아이들일랑 그 지방의 서울을, 말하자면 명문고를 만들어서 집중 관리하여 다시 서울에 보내면 된다. 그것이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다. 여기에 딴지를 거는 교육정책은 대중영합주의이다.’ 나는 그들의 이런 대답에 밤잠을 못이룰 만큼 걱정이 태산이다. 그들의 그 당치않은 믿음이 학교차를 이렇게 벌여놓았다고, 그게 아주 오래전 진행되어 왔었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문제풀이를 가르치고 그 결과를 똑같은 잣대로 똑같은 방식으로 평가한다면 결국 그것은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게 될 터이다. 어쨌든 평가의 목적(쓸모)이 아이들간에 차를 만들어내어 등수대로 뽑아 가는 것이라면, 그렇다면야 죽으라고 해도 끝내 등수로 평가받아 뽑혀가기는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뿐인가. 이미 하위권에 속해 있도록 배치되어 있는 지역과 학교가 정해져 있지 않은가.

이 기막힌 현실에는 까막눈인 채 학교간 학력차라는 현실에는 그다지도 눈을 부릅뜨는 것으로 보아, 거기에는 필시 무슨 말 못할 연고가 있지 않는가 싶다. 내가 이렇게 대들 듯 말하는 것은, 지식기반 사회에서 창의성이야말로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웅변하는, 그네들의 다른 목소리를 하도 많이 들었기에 그랬다. 한 줄로 세우는 평가방식 하에서 창의성을 기를 수 있다고 믿지는 않을 터이고, 그들도 분명 여러 줄을 세워야 다방면의 똑똑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가려내어 뽑아가는 봉건적 선발방식...내신 50% 반영은 더 독이 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학력의 차가 아닌 학교성격의 차에 주목한다.
내신은 성격이 다른 학교에서 성격이 다른 학력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제도적 장치라고 볼 여지는 없는가.
학교와 교사가 가르칠 바의 것에 대해 기획하고 그리고 가르친 것에 대해 평가하는 권한을 갖는 것, 그 기획과 평가를 전형자료로 삼아 아이들의 관심, 포부, 성취, 적성, 이력을 분별하여 선발하는 것, 그렇다면 가르치는 내용 목표가 다양해 질 것이고, 평가방식도 다양해질 것이며, 그만큼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젊은이를 책임지는 대학교육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신을 강화할 수는 없는지.

내신을 못 믿는다고? 내신을 못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등수를 가려 아이를 뽑아가는 대학의 반교육, 반인권, 반사회에 대해 먼저 분노해야 마땅하다. 평가와 선발이 교육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 교육 밖에서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형국을 두고, 대학의 선발 자율권 혹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정상적으로는’ 주장할 수 없다.

이미 오래전에 폐기했어야 할 '아이를 가려내어 뽑아가는' 봉건적 선발방식이 자아내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거기서 비로소 우리는 아이들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우선 학교의 내신과 대학별 사정(면접이든 논술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간에 직거래가 형성되도록 하자.
그 사이에 개입하는 모든 간섭 세력을 배제하자. 그것이 교육마인드이다. 대학은 학교의 내신을 모집단위별로 적합하게 읽어낼 수 있는 사정기준을 마련한다. 수능을 자격고사 내지 교육과정 완성도 시험으로 그 格을 달리한다. 학교와 교사는 교육기획과 평가를 기록하고 공개한다(기획과 평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학교 혹은 교사평가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쉽지 않은 줄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출발지점을 명확히 해야 종착지점에 이른다는 상식에 충실하다면 할 수 있다.
시작지점을 분명히 하고 그리고 종착지점에는 시일을 두고 다가가자.

지금의 내신 50%반영은 어쩌면 더 독이 될지 모른다.
학교시험도 준비하고, 수능도 준비하고, 대학별고사도 준비하고, 아이들은 삼중고를 겪게 될 것이다.

참여의 정치를 내세운 집권세력인데, 왜 개혁의 변죽만을 울릴까. 변죽만 울리려거든 차라리 손대지 않는 게 낫다. 성적을 가지고 줄을 세워 아이들을 뽑아가는 방식자체에 변화를 주지 않고, 이런 저런 ‘준비론’을 내세우며 핵심을 비껴가는 관료행정의 무정견에, 참여의 정치세력마저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듯해서 너무 안타깝다.

2006.05.12

김민남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경북대 교육학과)



(이 글은, 2006년 5월 14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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