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 신혼집, 사무치는 달빛...”

평화뉴스
  • 입력 2006.07.14 15: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말에세이] 이은정...
“어린 제비들, 울음소리에 아침잠이 깨어도 싫지 않았다”

내가 신혼살림을 시작한 곳은 산꼭대기였다.
목까지 차오른 숨을 침으로 삼켜가며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야했는데, 꼭대기에 올라서면 시원한 소나무 숲 너머로 시야가 확 트이면서 대구시내가 다 보였다. 화려한 야경을 보면서 산책하는 일은 산동네 사람들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미로 같은 골목길 안에 우리 집이 있었다.

우리 집은 참 작은 집이었지만 코딱지만한 마당이 있었고 워낙 ‘친환경적인’ 집이라 식구가 많았다. 몸집이 큰 산개미, 참 부지런히도 줄을 쳐대던 거미들, 한 길 넘게 펄쩍펄쩍 뛰어다녀서 사람 놀라게 하던 곱등이, 집게벌레는 궁둥이를 쳐들고 위협하다가 내 신발 세례를 받고 혼비백산 도망가기 바빴다. 가끔 더러운 곳에만 산다는 노래기가 나와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불청객은 바퀴벌레였다.

보름마다 창문으로 달이 찾아왔다.
창문 밖에서 지그시 우리를 내려다보다가 방 한가득 달빛을 비출 때면 너무나 행복했다.
달빛은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때 제일 뽀송하고 달콤하고 폭신했다. 코딱지만한 마당에는 우리 집 개 몽실이가 남편이 만들어 준 엉성한 개집 옆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꼬박꼬박 졸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는 제비가 많았다.
날 궂어 비라도 올라치면 녀석들이 너무 낮게 날아다녀서 귓전을 휙! 스치며 쏜살같이 지나가기도 했다.
제비는 급기야 우리집 처마 밑에도 집을 지었다. 어느날 밤늦게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니 제비 두 마리가 새까만 머리를 맞대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그제서야 우리집에 제비집이 생긴 걸 알았다. 그 때 벌써 녀석들은 알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다섯 마리가 태어났다. 서로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시끄럽게 보채는 어린 제비들의 울음소리에 아침잠이 깨어도 싫지 않았고, 머리 위에 제비똥을 묻히고 다니는 몽실이의 우스꽝스런 꼴을 보는 일도 즐거웠다.

여름이 되자 어미는 새끼들에게 날기 연습을 시켰다.
새끼들은 한 놈씩 어미를 따라 둥지에서 담장으로, 담장에서 전깃줄로 옮겨 다니며 떨어질 듯 말 듯 위태한 훈련을 거듭했다. 가끔 창문틀 위에 앉아 쉴 때에도 새끼들은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없는데, 어미는 참 초조해 보였다. 그러던 녀석들이 제법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더니 가을바람 부는 어느 날부터 조용해졌다. 서운하고 허전했지만 한동안 나도 무정한 녀석들을 잊고 지냈다.

이듬해 봄이 왔고 게으른 아침잠을 청할 무렵, 어디선가 제비소리가 들려왔다.
부리나케 마당으로 나가 보니 제비가 와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몽실이가 내 손을 핥아 대는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목이 빠져라 제비집을 쳐다보았다.

제비는 결혼을 하더니 장하게도 새끼를 낳았다.
헌데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인지, 새끼가 너무 보고 싶어 담장 위에 올라가 훔쳐본 게 들통난건지, 녀석은 낯을 많이 가렸다. 내가 마당에 들어서면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 이리저리 좁은 마당 위를 날아다녔다. “지지지 지리지리...”하면서. 좀 서운했지만 모른 체해 주었다. 새끼들이 마당에서 날기 연습을 할 때도 한참 쳐다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얼른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랬건만 이번에는 가을바람이 불기도 전에 제비집은 빈집이 되었다. 잘 보이려고 애썼는데... 쓸쓸한 제비집을 쳐다보며 어쩔 수없이 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이듬해 봄, 나도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바로 그날, 몽실이는 남편 친구들이 데려가서 멍멍탕이 되었다.
갓난쟁이 있는 집에 털짐승이 있으면 안된다나. 나는 제비를 기다리며 몽실이를 잊으려 애썼다. 우는 아이와 밤새 씨름하고 가물가물한 아침잠을 청할 때도 귀를 강구고 제비소리가 나는지 살폈다. 하지만 제비는 오지 않았다. 동네에도 제비가 뜸하더니 마침내 궂은 날 낮게 나는 제비도 볼 수 없었다. 제비 가족들의 부산함에 들뜨던 산동네의 아침도 시시해져 버렸다.

그 뒤 우리는 이사를 왔고 이사할 때마다 생기는 번거로움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면 산꼭대기 코딱지만한 그 집이 종종 생각나는 것이다. 그 집 마당이 넘치도록 안겨오던 사무치는 달빛이 그립고 서투르게 날던 어린 제비가 못내 그리워진다.

[주말 에세이 13]
이은정(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월간 소식지 <지빠귀와 장수하늘소> 편집장)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