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있을 때 사람은 흔들린다"

평화뉴스
  • 입력 2006.09.2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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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은임(방송작가)...
“가을, 나는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완전하고 싶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게서 나오네.
몸 속에 구멍 뚫린 피리나
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른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 말인가.
 
-음악, 이경임 詩
 
 
책꽂이를 다 뒤지고, 책상 서랍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겨우 이 시를 찾아냈다.
언젠가 술술술술 잘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 나를 얼얼하게 만들었던 시.
이 시를 수첩에 베껴 적어놓고 나달나달해지도록 갖고 다녔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나도 참 많이 변하나 보다.
 
 
얼마 전, 내가 방송국의  한  VJ에게 아는 척을 했더니,
그가 정색을 하고 나에게 물었다.
"저를 아세요? 그런데 누구세요?"
참,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감쪽같이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일까.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어느 봄날 새벽 2시.
다음 날 방송 때문에 방송국에서 밤샘을 하며 정신없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인터뷰 좀 해달라며 그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찾아왔었다.
주제 하나를 정해,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는 거리인터뷰 코너를 내일 아침까지 완성해야 하는데,
하루종일 비가 내려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하지 못했단다.
그러면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인터뷰를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진 내 원고도 원고지만,
그보다 새벽 2시를 넘겨가며 글을 쓰고 있는 내 몰골이,
도저히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죽 답답했으면 나한테까지 와서 이런 부탁을 하랴 싶어
눈 질끈 감고 관등성명까지 대가면서 인터뷰를 했었다.
그런데, 모른다니!
 
"아, 그분이세요? 그 때, 그 분... 이런 저런 내용의 인터뷰를 하셨던...
그런데, 진짜 그 분 맞으세요?"
그는 미심쩍은 눈길로 조목조목 내 얼굴을 뜯어보더니,
끝내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날 밤 자기가 보았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때 나는 봄 개편으로 프로그램이 바뀌어 여기저기 치이고 있을 때였고,
원고가 잘 안 풀려 있는 대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새벽2시! 아마 비몽사몽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나더러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냐... 그때는 분위기가 아주 색달랐는데, 지금은 못 알아보겠다"며
은근히 내 속을 긁어놓고 사라졌다.
 
당장,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지금 너무 평안하다.
머리를 들쑤시는 주변상황 때문에 갈등하지도 않고,
나 자신이 못마땅해서 동동거리지도 않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원만하게, 순탄하게,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의식을 못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때, 서른살은 온다'고 한 시인이 말했다.
나는 이제 서른 둘.
내게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이 너무도 많다.
그 매 순간들에 나는 흔들리고 싶다.
흔들리고 부딪치고 깨지며 자리잡고, 또 다시 흔들리고 싶다.
 
여백이 있을 때 사람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가져오는 사소한 파장.
삶을 뿌리째 뒤바꾸는 건 그런 사소한 흔들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이 가을, 생각한다.
여백이 없는 매끈함과 견고함은 얼마나 불행한가.
가을, 나는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완전하고 싶다.
 
[주말 에세이 16]
이은임(대구방송(TBC) 방송작가)


이은임 작가는 TBC [TV좋은 생각](수요일 밤 11시 5분)을 제작하면서,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위대함, 결국 세상을 변화 발전시키는 건 바로 그들"이라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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