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큼 있어야 삶이 행복할까?"

평화뉴스
  • 입력 2006.11.2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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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차정옥(동화작가)
“꿈 없는 돈은 끈 떨어진 연처럼 어지럽게 날아다닐 뿐..”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삶이 행복할까?
30평대 아파트 한 채 값? 유학 갈 자금? 평생을 놀고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돈?
그게 아니라면 무조건 많이?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겠지.
그런데 그 기준이 있긴 한 걸까?

모두가 가난한 동네에서 특별히 더 가난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내가 가난하단 걸 전혀 모르고 자랐다. 다 자란 다음에야 ‘비교의 대상’이 되는 세상을 보고, 나 같은 애를 보고 ‘가난한 집 애’라고 하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땐 이미 열등감보단 불평등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가난이 준 상처가 없다.
(우리 부모님이 동네를 잘 골라 이사를 왔지. 역시 노는 물이 중요하단 걸 새삼 느낀다.)

비싼 옷을 입은 친구가 없으니 더 예쁜 옷을 사 달라고 졸라 본 적이 없고, 모두가 종이 인형을 그려 대며 놀았으니까 ‘바비 인형’을 사 달라고 떼를 써 본 기억도 없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밀가루 떡볶이는 50원어치만 사면 실컷 먹을 수 있었기에 큰언니가 가끔 100원어치를 사주면 다음날까지 배가 불렀다. 무언가가 갖고 싶어서 돈을 열망할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그런 내가 환장하도록 갖고 싶어서 미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책’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언니 따라 간 만화방에서 아줌마가 귀엽다고 주는 단팥죽을 공짜로 얻어먹으며 뒤적거리던 5원짜리 만화책은 정말 별세계였다. 네댓 살일 때어서 글자를 몰랐는데도 내용은 다 이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앗’, ‘얏’, ‘받아랏’ 따위의 글자들을 ‘어머니, 아버지, 우리나라’보다 먼저 읽어냈다.)

국민학교를 들어가서 생전 처음 내 책(교과서)을 가졌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뒤로도 해마다 교과서를 받으면 일단 한번을 소설책 읽듯 읽었다. 새 책을 펼칠 때 느껴지는 그 두근거림과 설레임이 너무 좋았다.
옆집에 내 또래 남매가 있었는데 그 집엔 당시로는 드물게 전래동화전집이 있어, 방학이면 아침을 먹자마자 늘 그 집으로 출근을 했다. 그때 읽었던 ‘은방울전’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 직장생활을 하던 큰언니가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교회를 다닌 덕에 크리스마스를 챙겼다) 때면 계림문고에서 나온 명작 동화를 한 권씩 사주었다. 그 때마다 이걸 다 읽으면 다음 읽을 책을 구할 때까지 얼마나 더 참아야하나 싶어서 그걸 아껴서 읽었다. 한꺼번에 읽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으면서, 줄어드는 뒷장들을 헤아려가면서... ‘백번 헤아릴 때까지 참고 읽기’, ‘고무줄 놀이 하고 와서 읽기’, ‘뒷 이야기를 열 가지 상상해보고 나서 읽기’... 그때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책을 아껴 읽으려고 써먹었던 방법들이다. (이런 얘길 내 조카들에게 하면 ‘바보 아냐?’ 그런 눈으로 쳐다본다)

늘 읽을거리가 고팠던 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사볼 수 있는 부자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다른 목표 따윈 없었다. 오로지 만화책부터 소설책, 시집 가리지 않고, 책값 들여다보지 않고 책을 살 수 있는 부자... 그게 내 돈벌이의 기준이었다.

지금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됐다.
적어도 내 손으로 돈을 벌고 나서부터 나는 사고 싶은 책을 못 사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내가 바라던 만큼의 돈을 벌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내 생활은 이런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재미있는 책을 신청해 놓고 다음날 택배 아저씨가 올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계속 시계만 쳐다보고 기다린다. 어떤 날은 읽던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차마 덮질 못해 몸이 아프다며 약속을 미루는 악행도 종종 저지른다. 기다리던 만화책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달음에 서점으로 날아간다. 어떤 때는 보고 싶은 책을 사 들고 집까지 오는 사이를 못 참아서 버스정류장 옆 찻집에 들어가서 다 읽고 집에 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 밖의 일에 돈을 쓰는 건 별로 즐겁지가 않다.
차를 샀을 때... 인생이 달라진다던 선배 말대로 달라지긴 달라졌다.
이젠 그놈의 주차난 때문에 예전처럼 시내에 내려서 책방을 들러 하염없이 책을 들여다보던 행복을 잃어버렸다.

작은 집을 마련 했을 때... 대한민국에서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진 걸 모두 축하해줬지만 정작 나는 당분간은 이사 땜에 책 안 싸도 되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다지 감격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정말 내가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은 어린 시절 꿈이었던 ‘원 없이 책 사보는 돈’뿐인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분명 행복의 조건이다. 하지만 모든 돈이 모두 행복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꿈이 없는 돈은 끈 떨어진 연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내 삶의 하늘을 어지럽게 날아다닐 뿐이다. 우린 모두 그 진실을 알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몇 천만원이 올랐다고 하는 아파트 값을 보면서 미친 세상을 원망하는 서민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우리 너무 서러워하지도 억울해하지도 말자. 그렇다고 그들이 늘어난 집값만큼 행복해지지는 않으니까...

지금 이 순간도, 만화가 양영순의 ‘천일야화’를 빨리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행복한 밤이다.


[주말 에세이 21] 차정옥(동화작가)
* 차정옥(35)님은, 200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화)로 등단해 동화작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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