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하시라. 술 한 잔 하자"

평화뉴스
  • 입력 2007.01.05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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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차정옥(동화작가)..
"자신에게 사랑받는 사람, 그와 있으면 먹 향기가 스민다"

어느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고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십대를 그렇게 보냈던 듯 하다.
이념보다는 그 이념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술 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퍽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삼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요즘, 나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소박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요 몇 년 사이, 나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싫어졌다.

내가 사랑했던 술자리의 분위기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었을 게다.
술자리의 분위기란 게 막걸리집이든 호프집이든 아니면 대학 캠퍼스 잔디밭이든 다 좋았던 걸 보면 그게 술집의 분위기를 말하는 게 아닐 테니, 아마도 나는 그 술자리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더 많이 누리고 산다는 게 한없이 미안하고, 자기를 더 많이 희생하지 못하는 것이 더없이 부끄러웠던 그때,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그 말들... 그 말들의 유통기한이 술자리가 파할 때 까지 뿐일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진실했던 그 말들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젠 술자리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말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삼십대는 현실 속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이, 적당한 체념과 적절한 타협이 조화로운 관계와 순조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걸 알아가는 나이.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듯 하다. 현명한 사람은 그 속에서 행함의 어려움을 배우고,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자기만의 원칙을 세우며 삼십대를 난다. 도전 받아본 적 없는 이념과, 갈등해보지 않은 원칙이 얼마나 나약한지 깨닫는 건 삼십대 인생살이가 주는 별책부록이다.

나는 그런 깨달음을 나를 만나는 시간에서 얻었다.
갈등하는 나를 다독거리면서, 비겁한 나를 위로하면서, 부끄러운 나를 격려하면서 나는 나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알몸 그대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타인의 추켜세움에 으쓱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반자인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험한 세상 살아나갈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누구도 부족한 자기를 보여주려 하지 않고, 나약한 상대를 보아주려 하지 않는다.
요즘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들.
술자리 내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면서 서로 동의를 구한다. (이 속엔 정치인들 욕도 포함되어 있다)
또, 자기를 인정해 달라는 말들로 채워진다. 자기의 부를, 자기의 지위를,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면서 부러움의 말과 존경의 눈빛을 요구한다.

그런데, 모두가 똑똑한 자기, 잘난 자기를 보여주기 바쁘다 보니, 정작 상대의 말이 내 귀에, 내 가슴에 들어올 겨를이 없다. 술자리를 파할 때쯤이면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한 말들과 헛웃음들이 탁자 위에 담배꽁초처럼 수북이 쌓여있다. 술자리 내내 허공에서 맴돌다가 그냥 맥없이 떨어져 쌓이는 위선과 가식과 허위, 자괴감과 욕망이 뒤엉켜 있는 오물더미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은 맥주 한 잔에도 속이 역겹다.

헌데, 이런 술자리임에도 유독 술자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무척이나 사교적인 사람들? 아니, 그들은 자기와 오롯이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 겁나고, 혼자서 만나야 하는 자기마음이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해 줄 수 없음을.
그 누구의 사랑도 그들의 외로움을 씻어 줄 수 없음을. 그래서 그들의 습관적인 술자리를 함께 하는 날은 마음이 슬프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까칠한 성격 탓에 그나마 별로 남지 않은 인간관계가 새해 들어 더 얄팍해질까봐 군말 하나 덧붙인다.)

내가 모든 술자리를 꺼리는 건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평소에 잘 돌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라도 즐겁다.
자신에게 사랑받는 사람 특유의 여유와 안정감이 있어 그 사람과 있으면 내 몸에도 먹 향기가 스민다.
그런 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도시 한가운데서도 밤하늘의 별빛을 찾는다.

새해엔 모두 그 동안 홀대했던 자기를 많이 사랑하는 해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다른 이들의 상흔도 어루만져 주면 좋을 테고.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전화하시라. 술 한 잔 하자.

[주말 에세이 26] 차정옥(동화작가)
* 차정옥(36)님은, 200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화)로 등단해 동화작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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