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구별 여행자'가 되고 싶다"

평화뉴스
  • 입력 2007.02.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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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은정...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일, 오늘 내가 계획한 전부였다"

만8년동안 애정을 쏟아왔던 환경연합 일을 그만두자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왜 그만뒀노?", "뭐할려고 하는데?" 하는 것이었다.

"그냥 놀려고...", "좀 쉴려고" 해도 당최 믿질 않는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의심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뭐 딴 거 할게 있겠지." 하고 섭섭한 얼굴로 돌아선다.

나는 정말로 놀고 싶었다.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시민단체 일을 10년 넘게 계속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일이 아니다. “시민운동 3년만에 머리가 비고 5년만에 가슴이 비고 7년만에 몸망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그 7년이 지나고 8년이 지나고 9년째로 접어들자, 미칠 것 같았다.
뭔 일을 저지를 것처럼 으르렁대는 나를 보자, 모든 걸 접고 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쉬면 다시 일하기 무척 힘들거라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가정경제는 어떡하냐고?
돈은 있는만큼 쓰고 없는만큼 쓰는 법이다. 없는대로 살면 된다는게 나의 경제관념이다.
실제로 나에겐 술마시는 것 말고 크게 돈 쓸일도 없었다. 물론 남편에게 기생하는 것이 주요 생존전략이긴 하지만.

일을 그만두는 모든 절차, 어려운 처신, 힘든 마음앓이도 곧 쉰다는 생각에 참고 버텼다.
내 평생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식, 나만의 시간! 내가 일을 그만두는 2007년 올해를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는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편물이나 파일관리, 주소변경, 보험처리 같은 소소한 일들을 정리하느라고 그렇기도 하지만 여전히 시간을 다투어 뭔가를 하려고 한다. 내 수첩엔 하루 일과를 점검하고 계획하는 깨알같은 글씨들이 빼곡히 박혀있어서 좀체 백수의 수첩 같지가 않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왜 그리 바쁜지 모르겠다. 뭣땜에 바쁘다고 꼭 집어 말하기 힘든데도 여전히 초조하게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아직도 아무 계획없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낯설고 두렵다.
치열한 생존전쟁터로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천천히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 일이 참 무능력해 보일 거라는 걱정도 한다.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이 꼭 진보만은 아닐텐데... 돈을 많이 버는 생존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꼭 행복한 것이 아니듯.

시간이란 무엇일까.
우주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게 연속성을 가지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시간만이 초와 분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한 해가 가고 나이를 먹게 된다.

시간의 분절은 인간을 속도의 노예로 만들었다.
속도에 사로잡히면서 평화롭고 풍만한 인간본성을 잃어버린게 아닌지.

저녁놀을 바라본 것이 하루 중 유일한 일이었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는가?
저녁놀을 바라보며 내가 느낀 환희와 경이로움이 내 삶의 하루를 윤기있게 장식할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겠다. “참 포시랍구만!” 팔자 편한 소리 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나는 끝없이 감사해 하고 있다. 지금을 있게 한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알기에 고맙고 또 고맙다.

오랜만에 겨울가뭄을 적시는 비가 온다.
비 맞는 도시풍경이나 차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무작정 버스종점까지 실려가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린다.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오늘 내가 계획한 일의 전부이다.

이제부터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이 나의 계획이자 목표이다.
시간여행의 종착지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즐겁고 풍족한 ‘지구별 여행자’가 될 것임을 믿는다.

[주말 에세이 28] 이은정
이은정(37)씨는 지난 1월까지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과 소식지 <지빠귀와 장수하늘소>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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