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서를 쓰는 이유"

평화뉴스
  • 입력 2007.03.0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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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류혜숙...
"모든 표정의 나, 그리고 지금 이 시간들이 중요해졌다"


껌뻑, 껌뻑, 껌뻑, 껌뻑, 껌뻑, 껌뻑...
하얀 빈 공간, 날씬한 커서가 제자리걸음한 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헉, 두 시간도 넘게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커서, 바보, 가 아니라 류, 바보다.
<자 기 소 개 서>라고 일단 써 본다. 그리고, 또다시 껌뻑이는 시간이 흐른다.

서른넷, 처음 써 보는 자기 소개서.
후배는 "그게 무지 어려운 거거든요. 근데 정말 처음 쓰는거유? 나는 수 십 번도 더 써봤는데. 진짜 오리지날 백수네" 하고 놀린다.

"임마, 넌 28년치만 쓰면 되지만 난 34년치를 써야된다고! 나는 위대해서 그런 자기소개서 같은 건 필요 없었다구"
큰소리는 쳤지만 내심 ‘처음’, ‘백수’라는 단어에 뜨끔했던 건 사실이다.

새로운 일을 하나 시작하면서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요구해 오는 것들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이력서를 내라, 사진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직접 처리해야 된다, 자기소개서를 첨부해라.
전부 Must다. must는 압력이다. 터지기 직전인 압력솥처럼 머리에서 김나는 일이다.

이력서를 보냈더니 냉큼 전화가 와서는 야단부터 친다.
“이게 뭐요! 이 사람이! 진짜 사회생활 안해 봤구만! 이렇게 내면 당장 땡이야!”
“그게 말이죠...열심히 쓴거거든요...”
어이없다는 듯 이것 저것 묻는 것들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잔뜩 주눅이 들어선 기어들어간다. 어쨌든 이력서는 통과.

문제는 자기 소개서였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소개하지?
검색을 해 본다. 온갖 양식들과 예문들이 뜬다. 몇 줄을 읽어 내려가다 창을 닫아 버린다.

뭔가 이상하고 이상하다.
모두 한사람이 대단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쓴 것 같다.
이런 걸 왜 필요로 할까. 왜일까. 이유가 뭘까. 뭘 바라는 것일까.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이유, 할 수 있는 능력, 하고자 하는 의지, 사회성 따위를 가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럼 그걸 쓰면 되겠군, 답을 얻었다는 듯 자신 있게 자판에 손을 얹는다.
1번, 성장 과정. 음, 좋아, 쓰면 되지. 정작, 나는 엉뚱한 것을 쓰고 있었다.

“자기 소개서라는 것은 내가 정말 그 일을 간절히 바라는 가에 대해, 왜인가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능력이 있는지, 의지가 있는지, ‘너 자신을 한번 봐라’ 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자신을 얼마나 연마해 왔는지, ‘새로운 시작’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는 ‘도전’ 인지, 타인을 설득하라는 것이 아닌 바로 나를 먼저 설득시키라는 엄한 명령 같습니다.”

몇 번이나 되 읽어보며, 좀 더 홀가분한 어려움을 느꼈다.
어린아이였던 시간, 학창시절,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의 나, 나의 꿈, 나의 열정이 향하는 곳, 그곳을 향해 달려오면서도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자위하며 기웃거렸던 무수한 샛길들. 그러나 그래, 나라는 나무가 뿌리박은 땅과 내가 자라나가고자 하는 그 어느 곳만은 변함없다, 라는 선언. 자기소개서.

그렇게 자기 소개서를 썼다. 물론 다 쓴 후 나의 혼잣말 같은 저 머리글은 잘라냈다.

구정이 몇일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나의 새해가, <자기 소개서>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올해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그려졌고, 그러자 더욱 바빠졌고, 더욱 활기 있어 졌으며, 나의 목표는 더욱 확고해졌다.

모든 각도에서, 모든 장소에서, 모든 표정의 나를 각인하는 시간들, 지나간 시간들, 도래할 시간들,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시간들이 중요해졌다.


[주말에세이 31]
류혜숙(평화뉴스 문화전문기자) pnnews@pn.or.kr /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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