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값 하며 살고 싶다

평화뉴스
  • 입력 2007.03.0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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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차정옥(동화작가)..
"나로 인해 가슴 한구석 무너져 내린 사람들, 고맙습니다"

설 연휴 마지막 날, 같이 밴드를 하는 친구들과 술을 한잔 하는 자리가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나이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설 쇠었고, 떡국 한 그릇 먹었으니 이제 몇 살이지?’ 하면서 서로 나이를 셈하고 있는데 가장 나이 어린 친구가 새해 들어 스물여덟이란다.

삼십대 후반인 나와 사십대를 막 접어 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와, 좋은 나이네."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스물여덟. 정말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끔 만드는 아름다운 나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맹랑한 친구가 태연하게 받아치는 말이 "서른일곱도 좋은 나이에요."

그래, 올해 내 나이 서른일곱이다.
근데 그 친구의 말은 나이 많은 선배에게 예의상 던지는 답일 테지만, 사실 나는 그 표현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내 나이를 그저 ‘좋은’이란 수식어로 꾸밀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더할 수 없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서른일곱을 사랑한다.
내 판단에 스물여덟은 ‘좋은 나이’일 수 있지만 서른일곱은 ‘사랑해야 하는 나이’이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 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 황지우 ‘뼈아픈 후회’ 가운데


황지우 시인이 몇 살에 이 시를 썼나,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삼십 대에 접어든 뒤부터 한 살씩 더 먹으면 늘 이 시가 떠오른다. 내가 떡국 한 그릇 먹으며 나이 한 살 더하는 것은 결국 나를 사랑했기에 그 가슴에 사막을 떠안아야 했던 사람들의 덕이다.

나로 인해 가슴 한 구석 무너져 내린 사람들, 내 에고(ego)로 인해 마른 바람에 신음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 덕에 나는 오늘 또 이렇게 나이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빈말이라도 “그 나이만큼 안 보이세요.”하면 나는 뜨끔해진다.
어려보이는 껍데기에 열광하는 세상에서 칭찬이랍시고 건넨 그 말은 나를 아프게 한다.

혹시 나도 ‘나이 먹음’이 단순히 생물학적 노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부류였던가?
그게 기쁜 말일 수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 감히 그게 어떤 값을 치르고 얻은 나인데 그걸 깎아 먹는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감당해 준 찢기고 무너지는 아픔의 대가.
어떻게 감히 그 상흔들을 욕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게 속한 것이지만 내 몫이 아닌 것. 나이란 결국 그런 것 아닌가.

이상하게도 진행 중인 사랑은 상처 입은 밤으로 기억되지만, 지나 간 사랑은 내가 입힌 상처들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상처 덕에 그 사랑은 지워지지 않고 내 삶의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십대의 방황을 가슴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신 내 어머니,
이십대의 열정을 함께 울어준 친구들,
그리고 모진 내 에고로 인해 그 누구보다 뜨거운 사막을 견뎌냈을 내 첫사랑,
삼십대 접어들어서도 여전한 내 독단과 과욕으로 인해 피 흘렸을 동료들,
그 모두를 떠올리는 게 내가 더해가는 나이를 내게 새기는 방식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누군가의 나이 듦 역시, 내 가슴의 한 구석을 폐허로 만들면서 진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내 사랑이 그 가슴에 사막을 만들기도 했지만 또한 오아시스를 만들기도 했다는 것.
그런 위안마저 없다면 서른일곱 이 나이가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사랑스런 서른일곱 내 나이, 올해도 나이 값 잘 하며 살고 싶다.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번듯한 직장을 잡고….그런 나이 셈이 아니라 정말 다른 이의 상처를 볼 줄 아는 나이 값을 하고 싶다. 내 나이의 값을 치른 것은 내가 아니니. 그 셈을 기꺼이 감당해 준 것은 나를 더 많이 사랑했던, 그래서 더 많이 상처받았던 바로 그들이란 걸 기억하면서.

새해, 떡국 한 그릇 먹으면서 내 나이 듦을 위해 기꺼이 가슴 속에 사막을 내어 그 길을 가로질러 건너 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또 이렇게 한살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주말 에세이 30] 차정옥(동화작가)
* 차정옥(37)님은, 200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화)로 등단해 동화작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7년 2월 23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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