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박정희 향수, 역사적 가해자 편에 서는 것”

평화뉴스
  • 입력 2004.04.0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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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살인 75년 4월 9일.
인혁당 4.9열사와 함께 했던 림구호(56)씨...
“인혁당 사건은 정보부에서 처음 들어
...박정희는 인간의 생명.생존권 짓밟았다”





세계 최악의 ‘사법살인의 날’이라고 불리는 지난 1975년 4월 9일.
림구호(56)씨는 경기도 안양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지 1년만에 이뤄진 가족들의 첫 면회.
그러나, 가족들을 만난 기쁨도 잠시,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이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불과 20시간만에 이뤄진 사형집행. 합법을 가장한 사법살인이었다.
림씨는, 함께 반독재 투쟁을 했던 선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옥중 동지들과 함께 추모식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도 그 억울함과 분노에 치를 떨며 왜곡된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그에게 ‘박정희’는 인간의 생명.생존권을 짓밟은 가해자일 뿐이다. 그리고 박정희 향수에 젖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역사적 가해자 편에 서는 것이며, 결국 자신이 믿는 가치가 파괴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29년. 유가족들과 재야인사들은 사형이 집행된 4월 9일에 추모제를 거행하며 암울했던 그때와 열사들의 뜻을 되새기고 있다. 그러나, 올해는 탄핵과 총선으로 어느 때보다 ‘4.9제’에 대한 관심이 낮아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큰 상처로 남아있는 인혁당 재건위원회. 이 사건으로 희생된 8명 가운데 5명이 대구경북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활동했고, 당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7년동안 옥살이를 했던 림구호(56)씨. 최근(4.6) 평화뉴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29년 전 그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당시 시국 상황은 어떠했는지?
= ’72년 10월에 유신헌법이 나왔고, 다음 해 ’73년 8월에 일본에서 김대중씨가 납치됐다. 박정희의 탄압으로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73년 11월 5일에 경북대에서 반유신 데모가 있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으로 데모가 번졌고, 12월에는 전국 대학가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다음 해 ’74년 초에 장준하.백기완 선생을 중심으로 반유신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자,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 움직임이 식지 않자 ’74년 4월에 소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이 때, 경북대 여정남, 임규영, 이강철, 강기룡 등 많은 학생들이 잡혀갔다.

- 그때 무슨 일을 했는지?

= 나는 경북대를 졸업하고 정화여중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74년 4월 15일에 당시 고려학원 물리 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는 반유신 투쟁을 위한 지하조직 활동을 했다. 여정남.임규영 선배들과 비밀리에 만나 시국과 민족에 대해 얘기했는데, 아마 그렇게 활동하던 사람이 10-20명쯤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몇 명만 알고 나머지는 알 수 없을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

- 언제 경찰에 붙잡혔는지?

=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자 계속 도망다녔는데, 우리 집에는 경찰이 오지 않았다고 해 선배들만 잡히고 나는 괜찮은지 알았다. 그래서 ’74년 4월 30일 모처럼 집에 갔는데 그 자리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나에게 적용된 것은 긴급조치 1,4호 위반, 내란예비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이었다

- 인혁당(인민혁명당)이라는게 정말 있었는지?

= 나는 정보부에서 조사받을 때 ‘인혁당’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당시 반유신 투쟁과 민족운동을 하면서 어느 정도 지하조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혁당이란 말은 정말 몰랐다. 그때 베트남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것도 토론하고 했었는데, 당시 남베트남에 인민혁명당이라는 정당이 있었고, 그 이름을 따 중앙정보부가 꾸며낸 것 같다.

- 인혁당 희생자 가운데 대구 사람이 많은데?

= 4.19이후에는 사회운동을 대구지역에서 많이 주도했다. 특히, ’61년 5월 1일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절 행사를 대구에서 갖기도 했고, 서도원.도예종 같은 분들은 서울까지 올라가 데모를 주도하기도 했다.


- 인혁당 희생자 가운데 특별히 기억남는 분은?
= 나는 ‘여정남’ 선배와 가장 가까이 지냈다. 여정남 선배는 키가 183cm나 됐는데, 성품이 호탕하고 후배들을 잘 다독여 주셨다. 자신의 옷과 시계를 전당포에 맡겨 술값을 계산해 주기도 했는데, 선배님 집(수성구 상동)에서 많이 자기도 했다. 후배들이 선배님 집을 자주 찾아가니, 선배님의 어머니께서는 밤새 찾아온 사람의 신발 수를 헤아려 밥을 지어 주셨다. 나는 안양교도소에서 여정남 선배님의 사형 소식을 들었다.

-선거철을 맞아 ‘박정희 향수’와 ‘박근혜 바람’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생명과 생존권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 생명과 생존권을 짓밟아 자유.민주를 훼손했다. 대구경북지역에 ‘박정희 향수’에 젖은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가치(자유.민주)가 파괴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부정적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 편에 서 있는 불쌍한 여인이다. 박근혜씨는 또, 그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어떠한 화해나 청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안타깝다.

-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

= 감옥에서 8년 가까이 복역하다 지난 ’82년 3월에 출소해, 고향인 포항시 장기면과 청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그리고, ’87년에는 6.10항쟁에 참여했고, 재야단체인 ‘전민련’과 ‘국민연합’, ‘사회운동연구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96년부터 포항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 또, ‘민청학력 기념사업회’와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혁당 대책위원회’ , ‘피학살자 유족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포항에 있는 ‘민생경제와 시민정치를 위한 포항연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편, 인혁당 4.9희생자 유가족을 비롯해 지역 사회단체와 재야 인사들은 내일(4월 9일) 오전 11시에 칠곡 현대공원에서 ‘4.9통일열사 29주기 추모제’를 거행한다.
(문의.(053)424-0411. 이승우 011-9568-4560)

글.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사진.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동영상. ITNlife 정동현 프로듀서



<인혁당 관련 4.9 통일열사>






서 도 원 (당시 52세)
1923년 3월 28일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 출생
대구매일신문 기자
4․19 이전 청구대학교 (현 영남대학) 학생주임, 정치학 강의
4․19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위원장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7년 언도, 2년 7개월 복역
1967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구속, 무죄판결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으로 구속 당시 침술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 집행 (경남 창녕 선산에 안장)



도 예 종 (당시 51세)
1924년 12월 25일 경북 경주시 서악 출생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4․19 이전 대구대학교 (현 영남대학) 경제학 강사
4․19 이후 경북 영주군 교육감 당선,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
1964년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3년형 (당시 삼화건설 회장)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송 상 진 (당시 47세)
1928년 9월 18일 대구시 동구 백암동 출생
대구사범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공산초등학교, 대구초등학교 교사
4․19 이후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총무국장
1964년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행, 무혐의 석방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양봉업)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우 홍 선 (당시 44세)
1931년 출생
6․25 당시 고교생으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 육군대위 예편
4․19 이후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역임
5․16 이후 수배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 1년형, 집행유예로 석방.
(당시 골든 스탬프사 상무)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하 재 완 (당시 43세)
1931년 1월 10일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1950년 입대
1957년 중사 제대, 양조장 경영
4․19 이후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상북도 협의회 부위원장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으로 구속 (당시 건축업)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4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



김 용 원 (당시 40세)
1935년 경남 함일군 출생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4․19 이후 서울대 학생민통련 참가
5․16 이후 연행, 조사받고 나옴
1964년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연행, 조사받고 나옴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경기여고 교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이 수 병 (당시 39세)
1936년 12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생
부산사범, 경희대학교 졸업
4․19 이후 경희대학교 학생민족통일연맹 위원장.
5․16 이후 구속, 혁명재판에서 15년형 선고, 7년 복역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삼락 일어학원 강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경남 의령군 신반리에 안장)



여 정 남 (당시 30세)
1945년 5월 대구시 남일동 출생
경북고,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 반대투쟁 주도이래 학생운동으로 3번 제적, 군입대
1969년 복학
1971년 4월 정진희 필화사건으로 구속
1972년 11월 10일 유신반대 포고령위반으로 구속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장 석 구 (당시 48세)
1927년 9월 19일 서울 출생
1949년 7월 단국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9월 평화신문사 기자
1955년~61년 한국일보 대구지사장, 대구일보, 민족일보 기자
1962년~63년 대구 매일일보 기자
1963년 이후 한일협정 반대와 3선개헌 반대운동에 참가
1974년 6월 14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구속
1975년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



전 재 권 (당시 59세)
1927년 10월 12일 경북 상주 출생
6․25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 복역, 동아일보 대구주재 기자
4․19 사회당 참여 (양복 옷감 도매상)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구속, 15년형 선고됨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1986년 5월 7일 복역 후유증으로 병사



유 진 곤 (당시 51세)
1937년 4월 4일 경남 김해 출생
1953년 4월 부산 사범학교 입학
1954년 부산사범 사회과학 이론연구회 '암장' 회원
1956년 부산 사범 졸업, 울산 신암국교 재직
1964년 김해연구소 재직
1974년 5월 1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 무기형
1982년 12월 13일 형 집행정지로 출소, 투병생활
1988년 5월 5일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운명



이 재 문 (당시 47세)
1934년 경북 의성 출생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1971년 민주수호 경북대구협회 선전부장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1981년 10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 (백석 천주교 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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