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의 첫사랑"

평화뉴스
  • 입력 2007.03.3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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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이은임(방송작가)
"나에게 처음 보고싶다, 그립다..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또 봄이야 우린 이제 지겨워
늙은 나무들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한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치 내 마음이 읽힌 듯한 어느 봄날 저녁...

딸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오늘은 학교에 가져간 크레파스로 뭘 그렸어?”
“응, 짝꿍 얼굴 그리기를 했어”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는 학교 이야기를 할 때마다 신이 난다.
“반 친구들 중에 네 짝이 제일 좋아?”
“음... 우리 반 친구들 중에는 제일 좋아.”

잠시 뜸을 들이는 딸아이의 기색이 뭔가 수상하다.
“그럼, 학교에서 제일 좋은 친구는 누구야?”
그랬더니 딸이 목소리를 나지막이 깔면서 대답했다.
“그 아이는 1학년 6반이야...”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후,
매일같이 아일 등하교시키기 위해 학교에 들락거렸던 나는,
단 한번도 1학년 6반 교실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아이가 있는 교실과는 다른 건물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1학년 6반인 걸 어떻게 알았어? 그 교실에 가봤어?”
그랬더니, 딸은 “운동장 놀이 할 때 봤어. 명찰에 1학년 6반이라고 씌어있었어.”

아아... 이제 겨우 일곱 살(생일이 1월생이라 한해 일찍 학교에 들어간-)인 딸은,
운동장 놀이 시간에 1학년 전교생이 다 모여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
축구를 하고 있는 ‘그 아이’를 알아보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 아이의 뭐가 그렇게 예뻤어?”
“머리카락 색깔!”
나는 또 한번 기가 막혔다. 머리카락 색깔에 반했다니!

“머리카락 색깔이 어땠는데?”
“가운데는 까맣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연해져.
그리고 중간 중간에 아주 예쁜 노란색이 섞여 있어.
그 노란 머리가 엄마, 반짝반짝 해!“

아이의 시선은 이미 너무나 섬세해져 있었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운동장 한가운데 남자아이들이 모여 축구를 하고 있다.
봄 바람이 살랑 불어,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게 햇살을 받아서 철봉을 하고 있던 딸 아이 눈엔 그렇게 보였으리라...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잠시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머리카락 색깔이 꼭 전대호를 닮았어”

전대호라면...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단짝 친구 아닌가?
함께 종일반을 하면서 그렇게 3년을 함께 커왔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전대호랑 꼭 같아. 혹시 전대호 형일까?”
이런 저런 추측을 하던 딸이,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 눈썹이 빨개지는 것 같아.”
“눈썹이 왜 빨개져?”
그러더니, 딸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전대호가 보고 싶어.”

한밤중에 이게 무슨 난리인가.
그런데 울면서 뱉어놓는 다음 말들은 더 기가 막혔다.
그 아이를 보고 난 뒤로는 전대호 생각만 계속 나서,
짝꿍 그리기를 하는 시간에도 사실은 전대호 얼굴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자기 짝을 그렸다고 했단다.

다음날,
나는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딸아이의 첫사랑, 전대호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땄다’

나도 그랬을까?
나에게 제일 처음 보고싶다, 그립다... 는 마음을 가르쳐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마음이 차고 넘쳐 눈썹이 빨개지고, 급기야 눈물을 쏟아놓게 했던
그런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싱숭생숭, 아주 이상한 마음이 되어버린 나는...
읽다가 만 그 시집을 다시 들었다.
그 시의 끝 구절은 이랬다.


참, 그만 모든 것 내던지고 싶은 이 만신창이 별에서
숲은 무슨 배짱인지 또 거뜬히 봄을 시작한다.
환장할 일이다.



[주말 에세이 34]
이은임(TBC 방송작가)




(이 글은, 2007년 3월 23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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