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폭력 때문에 대의가 훼손돼서야.."

평화뉴스
  • 입력 2007.04.3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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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칼럼] 송필경...
"폭력에 저항하는 시위, 쇠파이프 만큼은 걷어내자"

지하철이 등장하기 전, 시내버스는 항상 아수라장이었다.
현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는 것은 물론 승객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붙이는 푸시 맨 역할까지 해야하는 차장은 대부분 십 오륙 세에 불과한 가냘픈 소녀였다.

버스 입구는 방금 탄 사람과 곧 내리려는 승객들이 뒤엉켜 있기 일쑤였다. 이런 승객을 정렬하는 일은 운전기사의 몫이다. 급출발과 급정거를 순식간에 해버리면 승객들은 뒤와 앞으로 크게 쏠리면서 웬만큼 정렬된다.

대신에 심한 몸싸움하듯 주위 사람과 밟고 밟히는 고통을 겪는다.
그러면 가끔 나이 좀 드신 아저씨들이 “무슨 운전을 이 따위로 해!”라는 고함과 함께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해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욕설이 운전기사가 아닌 차장에게 향하는 것이다.
운전기사에게는 대놓고 말 못하면서 만만한 차장에게 험한 인상을 쓰면서 냅다 소리치는 아저씨의 씩씩거리는 행동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대단히 유치했다. 승객을 짐짝 취급하는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서 일어나는 불편과 고통은 차장의 잘못이 전혀 아닌데도 말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건장한 남자도 하기 힘든 차장 일을 하는, 내 또래 소녀가 아버지 뻘 되는 아저씨에게 심한 욕설을 듣는 모습이 몹시 애처롭게 보였다.


"더 본질적 폭력은 쇠파이프를 쥐게 하는 법.제도.금권.언론의 폭력"

요즘 큰 시위가 있었다 하면 TV는 곤봉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쌍방 폭력을 보여준다.
피 흘리며 절규하는 노동자.농민의 얼굴과 중상으로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의무경찰의 모습을 오버랩 한다. 때로는 목숨을 잃거나 평생 불구가 된 동지들의 처참함과 자식같은 의무경찰의 고통에 눈시울이 붉혀진다. 노동자.농민과 의무경찰 가운데 누가 진정 가해자이고 누가 진정 피해자인지 분별이 안 되는 안타까움에 분통이 터진다. 이럴 때 불만에 막말하는 아저씨에게 차장이라는 이유로 수모 당한 소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시장만능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를 줄기차게 확대한 참여정부는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게다가 갑자기 불쑥 내민 한미FTA에 대한 참여정부의 외곬 집착은 노동자․농민은 물론이고 소규모 자영업하는 서민 대중에게 어지간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희망조차 앗았다. 나락에 빠진 노동자.농민.서민이 선택할 방법에 전투적 시위말고 어떤 선택이 있는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허탈한 그들에게 권력의 이성에 호소하여 생존권을 보장받으라고 훈수 두는 사람은 좋은 말로 천진난만한 사람이다. 참여정부에서 군사독재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문민정부와 국민정부에 비해 시위가 많았고 한층 더 과격했다.

군사정부 때부터 그래왔듯이 참여정부와 수구언론들은 ‘폭력.비폭력’을 자기 논리 잣대로 해석하여 과격한 시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난하고 있다. 시위 빼고는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노동자.농민들을 폭력의 화신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너무도 설득력이 없다. 시위에서 쇠파이프가 등장하고 않고를 두고 ‘폭력.비폭력’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논리는 분명 어폐가 있다.

인간의 행위에서 무엇은 폭력이고 무엇은 비폭력이라 규정하는 일은 무를 자르듯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위대의 쇠파이프에 있는 폭력보다 한층 더 본질적인 폭력은 쇠파이프를 손에 쥐게 하는 법.제도.금권.언론의 폭력이다. 특히 언론은 잘못된 논리를 확대하고 왜곡하는 데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전무죄.무전유죄’를 유발하는 법조계 관행만 하더라도 분명 금권과 사법이 합작하고 언론이 묵인하는 총체적 폭력의 예라 할 수 있다. 가진 자들의 ‘유전무죄’라는 고질적인 사회적 악폐에는 애써 눈을 감고, ‘무전유죄’ 때문에 저항하는 시위대의 쇠파이프에서만 폭력을 본다면 그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단세포적 사고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힘있는 자가 양보한 것은 민중의 폭력투쟁 결과이지 자비의 결과는 결코 아니었다.
기득권자들은 민중이 흘린 피만큼만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나 '비폭력'..변혁을 위한 전략과 도덕적 성찰을 갖춰야"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비폭력’을 가슴에 새겨할 중요한 화두로 삼아야 한다.
‘비폭력’을 앉아서 그냥 맞고 당하여 동정심에 호소하는 수단, 또는 타협을 구걸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비폭력은 폭력이 강요한 질서에 순교자적 반항이 아니라, 폭력의 유혹 때문에 나도 남에게 저지를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는 힘을 말한다. 아무리 민주화를 이룬 세상이라 하지만, 세상에 더러운 타협은 다하고 살면서 비폭력에 목청 높이는 밑 구린 자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은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발상일 뿐이다. 그러한 행위는 비굴이고 무기력이다.

비폭력은 ‘비타협’과 폭력에 항거하는 ‘불복종’을 전제로 한 정치적 행위가 되어야 본질적 의미가 살아난다.
이때 고심해야 할 문제는 ‘과격한 표현’의 도수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질적 변화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하는 근원적 모색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삶을 축적한 역사의 교훈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장기적인 전략을 짜내는 일이다. 시위란 어떻게 봐도 단기적인 전술일 뿐이다.

진보단체 지도부들이 평등파니 자주파니 하는 어찌 보면 자그마한 이념의 차이조차 극복하지 않고, 조직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잿밥에만 눈독들인 나머지 민중의 궁극적 승리를 꿈꾸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물질적 퇴폐만 넘실거리는 양극화 사회를 저지할 본질적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변혁을 위한 전략은 정치감각을 세련하고 도덕적인 성찰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폭력’이란 남을 저주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엄격하게 성찰하는 도덕적 행위의 극치이다. 더 많은 호소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나부터 먼저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위를 과격하게 하는 것보다 몇 백 배 더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과거를 쉽게 부정한 자들(이재오, 김문수, 김영환, 권용묵을 비롯한 뉴라이트라 자처하는 입에 담기조차 싫은 수많은 변절자들)은 실제 가장 폭력적인 단체를 이끌었거나 성찰없는 이념에 매몰된 전력이 반드시 있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성찰이 적을수록 폭력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고통을 주는 대상에게 투쟁하는 저항으로서의 시위는 분명 민주사회의 특권이다.
군사독재시절에는 시위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본질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시위 풍조는 근원적 폭력과 맞서 싸우기 보다 의무경찰 같은 말단의 폭력과 티격태격하다 상처를 받는 소모적인 면이 두드러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한미FTA 반대 집회에서 도청을 파괴하고 불을 지른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전술이다.
처절한 ‘약육강식’을 강요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입을 맞추는 집단은 참여정부와 거기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수구세력이다. 근본적 책임은 청와대이다. 일개 도지사가 왜 폭력 시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도청이 왜 불타야 하는가? 미래를 짊어진 어린 의무경찰에게 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가? 이런 식의 시위는 호소력이 없는 공허한 낭비일 뿐이다. 낭비를 자주하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총파업과 전면투쟁을 남발하면서 의무경찰과 반복적 충돌에 매몰하는 ‘쇠파이프적’ 시위는 민중의 열망을 낭비하는 행위로서 여론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없다.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한미FTA 같은 굵직한 현안에 대화조차 거부하는 참여정부 같은 정치 권력이 다시는 재생산되지 못하게 할 총체적인 전략을 어떻게든 짜내야지, 백골단이 아닌 의무경찰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것은 정말 성찰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불편을 겪은 승객이 어린 차장에게 욕설 퍼붓는 것처럼 유치하고 무책임한 감정적 배설일 뿐이다.
성찰이 적을수록 폭력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또 그러한 폭력으로는 궁극적 승리를 결코 얻지 못한다.

시위는 필요하다. 그러나 작은 폭력 때문에 대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시위에서 쇠파이프만큼은 반드시 걷어내자.


[시민사회 칼럼 92]
송필경(치과의사. 대구환경운동연합 전 공동대표)




(이 글은, 2007년 4월 19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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