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받지 못한 영혼"

평화뉴스
  • 입력 2007.05.0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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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우리는 용서 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 살고 있다"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어느 젊은이의 영혼에 귀를 기울인다.
프레이리의 방식을 빌려, ‘그가 들려준 말을 내가 따라 말함으로써 그의 말을 다시 들으려고 한다’.

일상의 삶에는 원수질 갈등도 없고 동지적 화해도 없다. 대단한 슬픔도 없고 별난 분노도 없다. 그저 그런 것들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만 그만하게 흘러간다. 자살폭탄 테러도 총기난사도 안주감일 뿐이고 수다꺼리일 뿐이다. 그것에 깊은 상처를 받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달구지로 도축된 소를 끌고 가는 살아있는 다른 소가 길가의 풀을 뜯으며 한가롭게 지나간다. 친구의 죽음을 싣고 가는 영구차 안에서 살아있는 다른 친구들이 웃고 소주잔을 나눈다.

소와 사람이 ‘정신건강’ 장치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스트레스를 속에 넣고 있으면 병이 된다며 술 마시고 쇼핑하고 여행가고 등산가고, 온갖 짓 다한다.

이런 겁먹은 소심증을 불모로, 잇속 밝은 전문가들이 좋은 것만을 생각하고 둥글게 처신하는 심리치료 처방전을 남발한다. 불의와 죽음의 속세일진데, 그게 성가심인데, 그 성가심만을 도려내 처치할 수 있다고, 그들은 마치 장사꾼 같이 행세한다. 정신주의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은 갈등과 화해, 해피엔딩과 비극적 종말, 주연과 조연이 있는 드라마와 같은 것일 게다. 너도나도 엉켜서 뒹구는게 삶인데, 그들은 삶을 구경꺼리로 취급한다.

삶은 강물처럼 흐른다.
발원지의 작은 물줄기가 짙푸른 바다 속으로 함몰되기까지, 완만하게 가파르게 흐름의 법칙대로 제 길을 간다.
흐름을 뒤돌아보고 흐름을 가늠해보는 것을 두고 인간 삶(인생)이라고 하겠지. 그렇다면야 인생은 살아온 내력(시간)을 엮어 만든 서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땀 흘리는 일꾼만이 구성진 이야기를 자아낼 수 있겠지. 고독을 씨줄로 희망을 날줄로 하여 이야기가 되도록 천짜기 하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해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터이다.

고독은 겪고 나서 비로소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너무나 뒤늦었기에 고통스런 깨달음, 그 고통과 깨달음 한가운데 어머니를 향한 통한의 그리움이 자리한다.
어머니에게 귀 기울이지 않은, 그래서 어머니를 말하지 않은 내가 영영 어머니를 다시 듣지 못하게 된, 내 삶의 불구를 깨닫는다. 어머니가 나의 고독인 것을, 거둘 수 없는 고독이 나의 어머니인 것을 알게 된 고독이다.

삶의 진실을 들을 수 없는 그래서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된 내가, 어머니를 회상하여 겨우 지어낸 삶의 진실을 내 아이에게 들려준들 그 아이가 내 진실을 들으려 할까. 내 아이도 내가 그랬듯이 내가 떠난 후 반쪽의 진실을 들었어야 했다고 고통스럽게 깨닫겠지. 고독의 대물림, 이 아픔이 인간 삶의 유한에 대한, 삶의 일상성과 죽음의 덧없음에 대한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세대 잇기의 인류적 방식이다. 고독만이 하늘로 눈을 돌리는 한가함을 준다.

오늘을 철학하는 것, 그것을 날줄삼아 삶을 천짜기한다. 어째서 이다지도 소심하고 조급한지를 묻는다.
그것이 내 삶이라고 눈물로 고백한다면 나는 내 삶에서 그 뿌리를 찾아들어야 하고 끝내 그것을 내말로서 폭로해야 한다. 하나의 정답과 같은 이유(뿌리)는 없기에 구석구석을 추적하여 이유를 천짜기 하듯 해야 한다.

슬픔도 기쁨도 그리움도 미움도 삶의 천으로 엮으면 그들끼리 친족이 된다.
가진 자의 오만도 못가진자의 주눅도 친족이 된다. 성가심이 밖에서 부과되었다고 그래서 객관화한답시고 ‘과학자’연 하지 않는다. 스스로 폭로할 수밖에 없는 내 삶이야기가 되도록 한 올 한 올 천짜기한다. 어떤 불가항력의 환경에 처해서도 내 삶이라는 것, 흔적없이 사라진 것 같아도 여전히 천으로 거기에 짜여 있다는 것, 그 천으로 삶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같은 흐름의 삶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폭로는 대물림의 존재론적 각성이다.

소심한 조급증에 시달리다가 삶의 천짜기를 놓쳐버린 채 남이 짜놓은 천으로 치장하다가, 저도 모르게 말하는 몸이 아니고 몸사리는 몸이 되어버린다. 몸부림칠 수 없는 몸을 가졌으니 그는 이미 세상의 객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식민지 세상에서 민족을 떠올리는 것은 존재의 몸부림이며 계급 세상에서 민중을 품는 것 또한 몸부림이다. 그 시간대에 반드시 민족과 민중을 천짜기하는 것이 내 삶에 희망을 심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희망을 단련한다. 그 단련을 교육이라고 혹은 교양이라고 혹은 경세라고 이름해도 된다.

삶은 고독과 희망의 이야기를 만들어 이웃을 초대하는 긴 학습과정이다.
밤새껏 이야기 나누는 우정이 있을 바에야, 그들간에 정치적 선택을 어떻게 하든, 얽혀 사는 삶의 흐름이 깨질 리가 없다. 그 어울린 삶이 불가역의 진보를 가져온다. ‘생이 도야한다’는 페스탈로찌의 헌신은 헛수고가 아닐 것이다.

우울증을 앓았다고, 그 우울증이 여인의 상실을 거치면서 원통하기 그지없는 사건을 저지르게 했다고, 고립이 우울의 원인인지 우울이 고립을 자초했는지, 그것은 호사가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그는 삶을 드라마 같이 받아들인 나머지 일상을 이야기하는 한가함을 잊었으리라고, 삶을 그로부터 빼앗은 정신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그의 주변을 원망한다. 뜻을 세우고 목표를 구체화하라고 채근한 성공한 유명인사들이 그를 성가시게 했겠지.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인생, 그것이 운명인데, 우리는 용서를 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 살고 있다.
용서받지 못한 인생을 누리고 있다.

<김민남 칼럼 10>
김민남(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경북대 교육학과. mnkim@knu.ac.kr )



(이 글은, 2007년 4월 24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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