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냄새 나는 땅을 꼭꼭 밟아 다니고 싶다"

평화뉴스
  • 입력 2007.05.18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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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진이(방송작가)
"동대구역에서 표 끊어 유럽까지 단숨에 갈 수 있으면.."

이런 속담이 있지, 왜.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지 모른다.’
뒤늦게 배낭여행에 맛을 들여서는 짬만 나면 훌쩍 떠나버리는 내가 꼭 그 짝이다. 진정한 여행 고수들과 비교할 때, 내가 밟았던 여행지는 정말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느낀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많았다고 자부해본다.

그중 하나를 떠올린다면, “세상에.. 우리나라는 섬이었어.”라는 것이다.
용감무쌍하게 혼자서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고, 우리 땅도 이곳저곳 마구 다녀보니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우리는 배나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다른 나라를 갈 수 없다.
한반도의 반쪽짜리 땅덩이 위에서. 동쪽 끝까지 가면 바다요, 서쪽 끝까지 가도 바다고, 남쪽도 역시 마찬가지다. 북쪽은 휴전선이 가로막혀있으니, 역시 못 건너가기는 바다와 다를 바 없다.

자, 이래도 우리가 대륙과 연결된 반도에 살고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섬이다. 원해서 그리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지난 60년 이상 우리는 섬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아왔다.

내 나라가 대륙의 일부이면서도, 섬나라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자주 이런 상상을 해봤다.
유럽의 유레일처럼 우리 철도도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굳이 힘들게 인천공항까지 가서 그 복잡한 수속을 밟으면서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외국을 여행할 수 있을텐데...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면 서울 혹은 강원도 어느 땅을 지나, 북한의 평양을 거쳐 중국을 찍고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동지역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거기서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와 다시 연결해 유럽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또 다른 노선도 있다.
대구에서 출발해 신의주를 거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당도해 시베리아 횡단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서. 광활한 시베리아를 건너 모스크바에 도착해서는 북유럽을 거쳐 서유럽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아, 이거 생각만으로 황홀하네.

물론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하늘이나 바다 위에 둥둥 떠서가 아니라, 나의 두 발로 흙냄새 나는 땅을 꼭꼭 밟아가며 여행할 수 있는 기쁨에 비한다면 고된 여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더군다나 이 열차노선은 인류문명의 정수를 집대성 해놓은 곳이다. 어찌 이 유혹을 그냥 뿌리칠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한지 10년이 넘은 것 같다.

12년전 러시아에서 갔을 때 이런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었다.
그때 나는 광복절 특집 프로그램을 위해서, 스탈린 시대 때에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하게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일부 구간을 체험하게 됐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은 침엽수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열차가 반세기 전만 해도 한반도가 출발지였을텐데, 분단과 전쟁이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고귀한 길을 끊어버렸구나 싶었던 것이다. 만일 분단과 전쟁도 없었다면, 망향의 슬픔을 안고 강제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는 고려인들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도 지금부터 훨씬 크고 넓은 가슴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2007년 5월 17일, 경의선과 동해선의 재개통은 내게 무척이나 크게 다가왔다.
상상만 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얼떨떨하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남북화해와 통일이라는 거창한 대의를 젖혀두고서라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꿈꾸던 여행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뜻모를 충만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동대구역에서 표를 끊어 기차를 타면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와 중동, 유럽까지 단숨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부산이나 인천 가서 배나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짜 유라시아 대륙 한쪽에 툭 불거져나온 반도 땅에 살게 되는 것이다. 섬이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 기차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나 실크로드와의 연결되기까지는 넘어야할 산이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발동이 걸린 기차가 멈춰서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많은 일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왜 이런 속담 있지 않은가? “시작이 반이라고.”


[주말 에세이 40]
이진이(대구MBC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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