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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슬렁거리며 동네 한 바퀴 돌기"
[주말 에세이] 차정옥(동화작가)..
"이 쳇바퀴 속에서 '쉼' 자체를 몇분이나 즐기고 있을까?"
2007년 06월 08일 (금) 01:43:01 평화뉴스 pnnews@pn.or.kr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몸이 찌뿌등 했다.
‘감기가 올려나?’
다이어리를 펼쳐보니 오늘 해야 할 일이 모두 세 가지이다.
연습실에 가서 기타 연습 하고, 들어오면서 서점 들러 책 사고, 저녁에 평화뉴스 주말에세이 원고 쓰는 것. 일단 안심이다. 과하지 않은 일정이어서.

근데 기타 연습 하는 내내 몸이 계속 가라앉아서 들어오는 길에 서점 들르는 건 포기하고 일찍 들어왔다. 차 안에서 집으로 갖고 올라 갈 짐을 주섬주섬 챙겨 들면서, 들어가서 원고를 빨리 써서 보내고, 오늘은 푹 쉬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차 문을 여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쟁쟁한 한 낮의 열기가 한 풀 꺾인 초여름 이른 저녁의 전형적 날씨가 바람에 실려 다가온다.
한 오 초 간 망설였을까? 나는 들었던 짐을 다시 차 안에 내려놓고, 구두를 벗고 차 트렁크에서 운동화를 꺼내 갈아 신었다.

몸이 좀 안 좋아도, 밀린 원고가 있어도 어찌 이 날씨에 어슬렁거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특별히 산이나 숲을 찾아서 걷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바람까지 맞춤한 날에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걸 더 즐긴다. 봄밤이나, 초여름 해 질 녘에 바람이 살풋 불면 나가서 걷고 싶어서 일이 손에 안 잡힐 지경이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걷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지만 혼자서 보는 영화가 더 몰입이 잘 되듯이 나의 이 어슬렁거림도 혼자일 때 더 매력적인 감흥이 있다.

건강을 위해서라는 목적의식이 없으니 운동이라고 부르기는 뭣하고, 산책이라 해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부르면 꽤 낭만적이고 고상한 느낌이 나서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 취미를 ‘어슬렁거리며 동네 한 바퀴 돌기’라고 나름 정의 내린다,

가방도,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그냥 빈 손으로 동네를 걷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 들려오는 소리들, 그리고 풍겨오는 냄새들에 온갖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폴폴 일어난다. 그 때 일어나는 생각들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생각들이어서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술자리도 일의 연장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잘 쉬어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과 가족들과 놀며 보내는 시간을 봉사라고 하는 아버지들도 있다.
더 멋진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더 열심히 돈을 벌기도 하고, 여가에 들이는 돈의 액수가 휴식의 질을 높인다고 믿기도 한다. 휴식의 시간도 자본주의적으로 해석되는 이 쳇바퀴 속에서 우리는 정말 진정으로 ‘쉼’ 그 자체를 몇 분이나 즐기고 있을까?

이런 고민에서 나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순간을 더욱 사랑한다.
늘 사는 데 도움 되는, 인간다운, 목적의식적인 생각들만 해야 하는 불쌍한 내 뇌가 ‘쓸데없는’ 생각들에 푹 빠져 노닥거리는 유일한 휴식 시간. ‘어슬렁거리며 동네 한 바퀴 돌기’가 내게 주는 의미이다.

집 앞에 있는 학교를 지나가는 날은 그 교정에 세워져 있는 꼬마들의 조각들이 바라보는 하늘을 함께 물끄러미 보고 오는 날도 있고, 나무가 많은 샛길로 길을 접어들 때는 그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물론 내가 멋대로 붙인 이름들이다) 걷는 날도 있다.

상가 골목을 지날 때에는 술집 앞에 쓰인 안주들의 이름을 읽으며 어떤 게 가장 맛있는 걸까 생각하기도 하고, 집에서 한참 떨어진 체육공원까지 갔다 오는 날은 운동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웃기도 한다. 늘 지나가는 길에 카 센타가 있는데 그 집에 원래는 흰 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인 꼬찔꼬질한 털을 가진 시츄 한 마리가 있다. 그 녀석이 늘 먼저 말을 걸어 와서 걔랑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날도 있다.

오늘은 바람이 좋아서 걷는 내내 바람을 생각했다.
어릴 적 동네 당산나무 밑에서 누워 있을 때 불던 바람, 대학 다닐 때 지리산에 올랐을 때 불었던 바람,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메베를 띄우던 그 바람...

어슬렁거린 시간이 꽤 길었나보다. 들어올 땐 벌써 날이 어둑해졌다.
기분 좋게 룰루랄라 집으로 들어오니, 이제야 생각난다. 주말 에세이 원고...

아, 내 뇌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선 시간이 좀 걸릴텐데,,, 이를 어쩌나...
몸이 다시 아프다.

[주말 에세이 43]
차정옥(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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