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떳떳한가?" - TBC 양병운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4.04.20 09:5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부정한 여인을 끌고 와 율법대로 처벌할 것인지를 묻는 군중의 물음에 답한 예수의 말이다. 예수의 이 말에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예수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난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이 아니다. 또 이 부분에 대한 종교적 해석이 앞으로 내가 말하려하는 논지와 연관성이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을 꺼낸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푸는데 다른 어떤 글귀보다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사를 분류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우리 기자들에게 가장 널리 적용되고 통용되는 것은 이른 바 ‘까는 기사’와 ‘빠는 기사’가 아닐까 싶다.

나름대로 설명을 한다면, '까는 기사'는 부조리나 비리 등 각종 문제가 있거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나 단체, 제도를 비판하는 기사고, '빠는 기사'는 선행이나 미담 등 사회의 존속 유지와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나 단체, 제도를 소개하는 기사다. 아마 대부분의 기사는 이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업계에선 이 둘 가운데 '까는 기사'의 가치를 더 쳐주는 경향이 매우 많다. 기자 스스로도 '까는 쪽'에 가까울수록 좋은 기사라는 인식과, 그런 기사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을 것 같다만.

나도 '언론'이라는 이 업계에 처음 나왔을 때, 나보다 먼저 업계에 몸 담으신 분들로부터 ‘조져라’,‘매우 쳐라’,‘죽여라 그래야 네가 산다’,‘설 조지면 게아리 타니까 뒷소리 안나오도록 확실하게 조져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년배 업자들로부터도 자주 들었다.

심지어 ‘공무원 몇 명 목 따고, 경찰 몇 명 옷 벗게 했다’,‘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오늘은 어떤 놈을 조질까부터 생각한다’라는 말을 자랑삼아 하거나, ‘그 새끼 요새 좀 아니던데 언제 한 번 날잡아 시원하게 조져서 정신 차리게 해야지’라면서 적개심에 가득 찬 업계 종사자들도 있었다.

'까는 기사'..."언론은 '깔 자격'이 있는가?"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고발이나 폭로기사라는 명분의 '까는 기사'를 비중있게 다룬다. 그리고 꼭 다음에는 “어제 뉴스에서 oo를 고발한 것과 관련해 해당 기관에서는 oo를 시정하기로 했다”거나 “본보 o월o일자 기사와 관련해 해당 기관에서는 관련자를 징계하기로 했다”라는 후속 기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다룬다. 그리고 회사 안팎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각종 상들이 기자에게 안겨진다. 업계 소식지에는 기자의 수상후기가 사진과 함께 실려, 상을 받지 못한 기자들의 부러움을 산다.

나도 한번 멋진 까는 기사를 써보고 싶다는 꿈이 이뤄지기도 전에, 내 머리 속에는 '과연 우리 업계는 깔 자격이 있는가' 하는 회의가 싹트고 있었다. 물론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

한번은 '장애인 편의시설 부족'이란 제목의 기사를 써라는 지시를 받고 여느 때처럼 관련 단체에 전화를 걸어 실태 조사 결과를 받으려고 하는데, 상대방에서 웃으면서 하는 말이 “TBC도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불편한 건물이던데요. 휠체어 경사로도 없고 장애인용 화장실도 없고 점자 블록도 없고....”

뭔가에 한대 맞은 듯한 난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데스크에 가서 “이 기사 못 쓰겠습니다. 우리 회사에도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는데 어떻게 쓰겠습니까?” 결국 기사는 안나갔지만 아직도 장애인 편의시설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경찰과 함께 속칭 '보도방'을 덮쳤을 때, 통상적으로 주부나 대학생이 끼여 있으면 “왜 이런 일을 하게 됐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런데한 아가씨가 “기자들은 여자 나오는 술집에 안가요? 자기들도 가면서 왜 우리만 나쁜 사람으로 취급해요 술집에 있는 여자는 나쁘고 술집에 오는 남자는 안나빠요?” 역시 양심을 찌르는 일언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 기자들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멀쩡히 보도국 안은 금연 구역인데도 기자들이 담배를 피워대는 언론사가 많다. 그런데 뻑하면 “금연구역 제대로 안지켜진다", "당국도 손놔”,“있으나 마나한 금연법”이란 기사가 잘 나간다.

지난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 때 일이다. 모 신문사 사장이 세금포탈,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될 때 소속 기자들이 군대 도열하듯이 죽 서서 “사장님 힘내세요”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는 기사를 접했을 땐 암담했다.

자기들은 '전문직이나 자영업자들이 세금을 제대로 안낸다'는 기사를 연중 행사처럼 써대면서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걸 시위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는 생각이었다.

'시대의 양심'인양 떠드는 언론..."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꼴"

언론과 기자, "그간의 잘못을 사죄하고 거듭나야...말이나 글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줘야"


이런 사례는 정말 비일비재하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는 세상의 잘못된 것들이 정작 신문사나 방송사에서도 버젓하게 벌어지고 있는데도, 자기들은 '시대의 양심'인양 '사회 정의 실현의 주체'인양 너무나 뻔뻔스럽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등으로 세상을 나눠놓고 요목 조목 잘도 따지고 든다.

시청자에게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고 알권리도 충족시켜준다는 참으로 할 일 많은 방송사도, 온갖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바른 말하는 집단으로 시청자들을 세뇌시키거나 최면을 걸고 있다. 이건 일종의 사기다. 심하게 말하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다.

이제 내가 첫머리에 들고 나온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는 말로 돌아가겠다.

만약 한국의 기자들이 부정을 저지른 한 인물을 둘러싸고 온갖 질문을 하며 죽일 놈으로 몰고있는 자리에 예수가 나타나 “너희 중에 부정없는 자가 있다면 기사로 쓰라”고 했다면, 과연 기사를 쓸 기자가 있을까? 게다가, "부정있는 자가 기사를 썼다면 당장 지옥으로 간다"는 조건도 붙어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군중들은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았는지 몰라도 대한민국 기자들은 기사를 썼을 것이다. 당장 지옥으로 갈지언정 지면은 메우려 들 것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사 말미에 “한편, 어제 취재 현장에는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 취재 기자들에게 부정없는 기자만 기사를 써라며, 만약 부정한 기자가 기사를 썼을 경우 지옥에 간다며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라고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장한다. 이제 신문과 방송사라고 일컬어지는 집단도, 또 그 집단에서 기자라고 명함 들이밀고 다니는 업자들도 시청자와 독자 앞에 그간의 잘못을 사죄하고 본래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거듭나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말이나 글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똑바로 보고 듣고 생각한 뒤 제대로 쓰고 말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선 역사와 국민 앞에 떳떳할 수 없다.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없다. 한마디로 세상을 탓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 그건 그렇고, '까는 기사'든 '빠는 기사'든 어디 기사 될만한 건 없나? 총선 끝나 기사꺼리 없어 고민하는 난 뭐지?

양병운 기자(대구방송 보도국)






---------------------------

<기자들의 고백>은,
대구경북지역 기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싣는 곳입니다.
평화뉴스는, 현직 기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고백들이
지역 언론계의 올바른 문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앞으로, 기자들의 글을 월요일마다 바꿔 싣고자 하오니
지역 언론인들의 많은 참여와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글을 써 주신 기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화뉴스 http://www.pn.or.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