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의 첫 사랑"

평화뉴스
  • 입력 2007.10.1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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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유지웅(평화뉴스)
"코스모스 가을길 따라 떠나 온, 그 학교가 문을 닫는다"

아버지의 진짜 첫 사랑은 나도 모른다. 어머니가 첫 사랑이라는 아버지 말씀을 믿을 뿐이다. 아니면 또 어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 고로중학교 교사였다. 1회 졸업생들이 아직도 명절마다 찾아온다. 말만 '사제지간'이지 10살도 차이 안나는 '호형호제' 같은 사이로 보였다.

아버지는 어쩌면 '연애 도둑'이었다.
그때가 1960년대. 고로중학교와 100미터쯤 떨어진 고로국민학교의 한 남자 선생님이 어머니께 연애편지를 전해줬다. 그 시절 어머니 사진을 보면 정말 '예쁜 여선생님' 그대로였다. 그 남자 선생님은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아버지께 "김 선생님께 좀.."이라며 연애편지를 부탁했고 아버지는 한동안 연애편지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도 '김 선생님'께 마음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김 선생님께 사랑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 국민학교 남자 선생님과 '피할 수 없는 결투'를 했다. 그것도 김 선생님 집 앞에서... 김 선생님은 고로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고, 결투 현장은 교장 사택 앞이었다.

김 선생님은 두 남자의 '결투' 내내 집 안에 숨어 있었다. 결과는? 어머니도 모른다. 아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밤 늦게 사택 밖을 내다보니 아버지 만 평상에 누워 있었다.

"끝까지 남은 이 사람.." 김 선생님은 이듬 해 나를 낳았다.
"그때 내가 왜..", "결국 용기 있는 놈이.."라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때를 떠올린다.

나의 첫 사랑도 여전히 지금의 아내다. 아내는 절대 믿지 않는다.
나는 "사춘기 그 시절에..", "잠시 좀 지냈지.."라고 말할 뿐이다. '사춘기 그 시절에' 사랑 한번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사춘기 첫사랑도 아버지의 그 학교에서 시작됐다.
아버지는 고로중학교 ‘교감선생님’이 되셨고, 나는 ‘교감 아들’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입학했다. 남녀공학 시골 중학교. 각 학년마다 남자 한 반, 여자 한반이었다. 여드름 빡빡하던 나는 ‘교감 아들’이라는 이유로 힐끗 힐끗 쳐다보는 눈길을 늘 느끼며 지냈다. 교무실의 선생님 대부분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를 안아주시던 분들이셨다.

중학교 1학년 1반 그 해 3월. 전교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회장에는 남자 혼자, 부회장에는 여자 2명이 출마했다. 학교 조회 때 ‘유세’를 했고, 나는 그 2명 가운데 한명의 누나가 예뻐 보였다. 물론 그녀를 찍었다. 포플러 나무 향기 가득하던 봄. 3학년 형.누나들이 우리 반 환경미화를 도와주었다. 그때 다시 그녀를 봤다. 아 절묘한 순간... “니가 유지웅이야?” “예”... 그 후로 몰래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일요일이면 첫 차를 타고 그녀가 사는 꽤 먼 동네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왼편에는 개울이 흘렀고 우리는 그 개울가에 자주 갔었다. 밤도 깊었다. 쪽지에 접어 접어 쓴 연애편지, 가슴 두근 두근하는 설레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소문이 났다. “유 교감 아들 누나 사귄다메”...

그러나, 이별은 지독스레 빨리 찾아왔다.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갓 지난 그 해 9월, 나는 대구로 전학을 왔다.
아침 8시 30분. 면 사무소 인근 빵집 앞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동네 아주머니가 꼬깃꼬깃한 돈을 쥐어주시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래 잘 가거래이. 공부 열심히 하고..자주 놀러 온네이”. 버스는 가을 아침 시골길을 천천히 달렸다. 흙먼지 가볍게 날리는 길. 멀리 중학교가 보이고 길가에는 코스모스 분홍빛이 흩날리고 있었다. 창 밖을 보며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냥 계속 눈물이 났다. 내 옆자리에는 아버지가 앉아 계셨고, 나는 ‘전학서류’라고 적힌 1호 봉투를 들고 있었다.

떠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춘기, 늘 그 곳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보고 싶은 사람도, 정겨운 학교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을 울렸다. 그러나 마음처럼 갈 수는 없었다. 도시 아이들 속에 ‘촌놈’이라 불리는 전학 생활이 익숙지 않았다. 영어 선생님은 나를 ‘컨츄리 보이’라 했고, 성당에 가면 후배들이 ‘촌 히야’, ‘촌 오빠’라고 불렀다. 전학 온 그 해 겨울, 고로에 가서 1학년 남녀 친구들과 눈싸움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한참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한 여학생이 나에게만 눈을 던졌다고 한다.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참 좋았다. 그리고 중3 때, 고입 학력고사를 치고 며칠 뒤 다시 고로에 갔다. 넓은 운동장. 방학이라 학생들은 없었다. 한 두 친구만 만나고 돌아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대구로 전학 온 지 몇달 뒤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 섭섭했다. 벌써 잊은 것일까?
이 역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와 고모가 그 연애편지를 내게 전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나보다 2살 많은 그 사람도 대구의 ‘여고’에 입학했고, 우리는 대학생이 돼서야 한 두번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잊혀져갔다.

고로중학교 화단...그때나 지금이나 참 예쁘다. (사진. 고로중학교 홈페이지)
고로중학교 화단...그때나 지금이나 참 예쁘다. (사진. 고로중학교 홈페이지)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학성리.
‘경북 제일 골짜기’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면사무소가 있던 학성리는 엄연한 ‘면 소재지’였다. 고로국민학교, 고로중학교가 있었고, 하루 3번쯤 국신여객. 제일여객 버스가 오갔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다는 ‘인각사’도 가까이 있었다. 우리는 그 곳을 ‘ㅇㅇ리’라는 행정지명을 쓰지 않고 ‘둥디’라는 오래된 마을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와 나의 첫사랑 추억 가득한 그 곳 고로중학교.
그러나 내년에 결국 그 학교는 문을 닫는다.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전교 3학년 여섯 반에 200명쯤 됐는데 지금은 겨우 전교생 12명. 오래 전부터 ‘폐교 대상’이었다.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학성리 고로중학교...내년이면 문을 닫는다.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학성리 고로중학교...내년이면 문을 닫는다.


며칠 전 경북교육청의 ‘폐교 예정’ 보도자료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낸 ‘고로중학교’ 이름을 봤다. 마음이 짠했다.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보고 또 한참을 생각했다. 나의 첫사랑... 한동안 학교 건물이야 남겠지만, 낙서 가득한 책걸상과 운동장을 둘러 싼 포플러, 가을 길가의 코스모스는 또 얼마나 남을까. 추억은 결국 사람으로 남을텐데...

한 이틀 밤잠을 설쳤다.
아련한 기억 속에 나는 잠시 그 시절 사춘기로 돌아가 있었다.
코스모스 가을길 따라 떠나 온 그 곳, 14살 고로중학교 1학년 1반 그 때로...





[주말 에세이 55]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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